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정치운동의 광풍으로 중국 스스로도 십년간의 동란(動亂)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정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며,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이 주 원인이었지만 사건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말에 당시 북경의 부시장이었던 오함이라는 사람이 ‘해서파관(해서가 파직되다)’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명나라때 청렴했던 해서라는 관리가 무능한 황제에 의해서 파면된다는 것이었다. 

권력에서 물러나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던 모택동에게 그의 부인이었던 강청과 상하이 신문사의 편집장이었던 요문원이 정치적 혼란을 야기 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요문원은 해서파관이라는 글에서 해서라는 관리는 팽덕회(항미원조 사령관)이고 무능한 황제는 모택동을 빗댄 것이라고 비판했다. 

1966년 5월 강청과 요문원은 다시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모택동은 이를 이용하여 ‘516통지’를 발표하면서 중국 당대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임표는 “모택동 주석은 천재이고 모택동이 말한 것은 무엇이든 옳다”라는 연설을 하면서 모택동에 대한 본격적인 숭배와 우상화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강청과 임표는 중국내의 권력을 자신들의 수중에 넣기 시작했고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는 북경대학과 다른 교수들을 반당(反黨), 반혁명(反革命)분자라고 비난하였다. 모택동은 그를 지지하면서 그의 글을 전국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서 청화대학교 부속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홍위병을 결성하였고 이들은 자신의 학교의 대문을 파괴했다. 모택동의 지시를 받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자본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모택동은 인민일보와 언론, 그리고 홍위병을 동원하여 당시 중국 정부의 책임자들을 모두 몰아내는 선동전술을 전개했다. 그는 현재의 중국에서 자본가 계급이 타도되었으나 여전히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새로운 세력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진정한 공산주의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선동했다. 

모택동의 선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이제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군인들도 동원하였다. 특히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합쳐서 ‘4개의 낡은 것’으로 모두 타도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낡은’ 이라는 단어를 ‘전통’으로 바꾸면 중국의 모든 전통들을 다 없애겠다는 것, 즉 중국의 전통을 송두리째 제거한다는 것이다. 

1966년 8월에는 북경 천안문 광장에 수백만명의 홍위병이 모택동과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이들을 칭찬하고 선동하여 파괴의 강도가 더 높여지게 되었다. 중국의 사원과 서당, 학교, 교회, 수도원 등 모든 종교시설과 교육시설은 문을 닫았고 약탈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공격도 서슴없이 가해졌는데 두 달간 북경에서만 약 2천명이 살해되었고 상하이에는 자살자를 포함하여 1천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중국은 이제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유소기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들이 실각되거나 숙청되었다. 군대도 모택동의 지시하에 많은 지도자들을 숙청하고 임표가 그 권력을 장악했다.   

모택동은 권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심지어 우상화에 성공하게 되자 이번에는 홍위병들의 혼란함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구상한 것이 지식청년들이 시골에 가서 다시 배워야 한다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도시의 많은 학생들이 시골에 가서 육체적 노동을 하였고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국 대학은 모두 폐쇄되었고 1978년 등소평이 다시 권력을 잡은 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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