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금불변의 진리이다. 좌측이 있으면 우측이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다. 그 가운데 있는 우리는 참으로 난해 하고도 복잡 다난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 중심을 잡기란 마치 곡예사의 능력과도 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격려와 칭찬 뒤에 숨은 시기와 질투처럼 요즘 세상의 일상들이 또한 그러하다. 바이러스와 백신의 숨바꼭질 또한 유사한 성격을 가진 현실이다.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질곡의 벼랑으로 몰아넣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종종 있다. 

선함과 악함의 경계선에서 진퇴를 고민해야 한다면 고민을 함이 정답일까? 당연히 선의 방향으로 가야함에 고민은 부당하단걸 알지만 우린 종종 기로에서 번뇌 할 때가 많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로 알려진 강원도 영월에는 단종이 2개월간 유배되어 살았던 청령포가 있고,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기 전까지 두달 여를 기거했던 관풍헌이 있다. 그리고 청령포가 건네다 보이는 방절리 입구에는 왕방연의 시조비가 설치되어 있고, 장릉 뒤편으로는 충신 엄흥도 비각이 위치하고 있다.

단종이 유배 되자 단종복위를 추진하던 세력들이 처형을 당하고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역모는 계속 될 것이라는 진언으로 결국 사약을 내리기로 한 어명을 받들어 당시 의금부사 였던 왕방연은 단종에게 사약을 진언한 후 애절한 마음에 길을 떠나지 못하고 애간장이 녹는 심정으로 청령포를 건너보며 시조를 지었다고 한다.

“천만리 머나 먼 길 고은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 놋다”  바로 이 유명한 시조비가 지금도 청령포가 건너다보이는 강 언덕에 서있다. 

그리고 사약을 받고 시해된 단종을 옹호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 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리로서 선행을 택한 영월호장 엄흥도는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고 무덤까지 만들어 봉헌을 했다. “爲善被禍 吾所甘心”(위선피화 오소감심) -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게 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노라는 엄흥도의 소신이었다.

그리하여 장릉 뒤에는 엄흥도 정여각이 건립되어 단종을 옹위 하듯 자리하고 있다. 왕방연의 애절함과 엄흥도의 충절이 함께 하는 곳 영월 곳곳을 돌아들며 잠시 상념에 든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중심을 찾아야 하듯이 서로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각자 시름하던 왕방연과 엄흥도를 생각하면서 복잡하고 아리송한 오늘 잠시 시름 섞인 상념들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왕방연의 시조 비 앞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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