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정부의 정책 중 가장 민감한 문제는 아마 부동산관련 정책일 것이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의 부동산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이집트의 압제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각 지파와 가문에 따라 땅을 분배받았다. 분배받은 토지는 함부로 팔 수 없었다(레 25:23). 어려운 사정으로 토지를 팔았을 경우엔 가까운 친족이 그 토지를 되사주어야 한다는 제도까지 있었다(레 25:24-26). 이런 책임이 있는 사람을 ‘기업 물러 주는 자’, 즉 ‘고엘’이라고 한다. 

사실 이스라엘의 부동산거래는 임대차에 가까웠다. 매 50년마다 모든 토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는 ‘희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레 25:10). 땅을 판다는 것은 최대한 49년까지 빌려주는 것을 의미했다. 땅 매매 가격은 희년이 지난 후 다음 희년이 되어 그 원 주인에게 돌려질 때까지 그 땅의 수확량 정도와 남은 연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땅을 판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가 판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땅을 사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나머지를 지불하면 되었다(레 25:27). 원천적으로 이스라엘의 토지제도는 부동산 투기나 부동산 가격급등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였다.

하지만 다른 가문의 토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자손이 없는 가문의 토지를 사는 것이다. 상속자가 없으니 대가 끊겨서 앞 세대가 죽으면 그 토지는 자연히 되돌릴 필요 없이 토지를 구매한 사람 몫으로 남겨진다. 

룻기 4장에 등장하는 ‘아무개’는 죽은 엘리멜렉의 기업을 되사줄 책임을 자기가 감당하겠다고 하였다. 대를 이를 자식들까지 다 죽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자기 땅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룻 4:4). 하지만 단지 기업만 물러줌과 동시에 죽은 아들의 아내를 떠맡아서 그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그 유산을 이어가게 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급히 발을 뺐다(룻 4:6). 자기 돈을 들여서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는 재산상 손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기에 친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회적 비난과 불명예를 감수하였다. 성경은 그의 이름을 무명 즉 ‘아무개’로 처리하였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은 이기주의자임을 폭로한 셈이다. 그는 재산상의 손해는 피했을지 몰라도 진정한 칭찬과 명예는 후순위자인 보아스에게 빼앗겼다. 작은 것에 집착하고 탐을 내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실 예가 아무개의 경우이다. 

돈과 이익 앞에서는 어떤 명분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세태는 주변에 널렸다. 돈이 신이 되어버린 세상, 선택의 기준이 오로지 돈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작은 이익을 쫓아다니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잊지 말자. 내가 잃어버리지 말고 붙잡아야 할 중요한 가치는 진정 무엇일까? ‘소탐대실’이기보다는 차라리 ‘대탐소실’이었으면 좋겠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라는 짐 엘리엇의 말이 다시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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