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기는 대약진의 광풍이 중국 대륙을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그 정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모택동에게 대립의 각을 세운 인물이다 유소기는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에서 태어났고 지금 호남성의 수도인 장사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다음해인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될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2년에 중국에 귀국하여 노동운동을 통해 공산주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력이 결렬되자 지하 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후베이성과 상하이의 당 조직을 이끌었다. 모택동이 농촌에서 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소기는 도시의 지하 게릴라 운동을 전개했다.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의 군대를 피해 대장정을 하고 있던 중 모택동이 권력을 잡게되는 존의회의가 있었다. 이때 그의 도움으로 모택동은 공산당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국가 부주석을 맡았으며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내면서 중국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모택동의 관계는 같은 고향이며 혁명적 동지의 끈끈한 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고 동시에 권력의 개인 집중화가 심화되면서 이 두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약진 운동이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모택동은 1959년 형식적으로 권력에서 내려왔다. 

유소기는 실용주의적인 사고와 현실적인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때 등소평도 그를 도와 중국 경제를 회생시키는데 기여했다. 모택동과 유소기는 같은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과 세계관에는 차이가 있었다. 

모택동은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지주들은 착취하는 존재로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유소기는 자본가가 착취하는 계급이지만 이들과 필요한 부분은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본가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함으로서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되고 또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농민도 무조건적인 평등이 아니라 수입의 일부분은 농민들에게 돌려줌으로서 생산의욕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유소기의 정책은 훗날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노선에서 유소기와 모택동은 갈등을 빚었고 이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유소기는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도 농촌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직접적인 농민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소기는 당시 등소평과 함께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실시했고 중국의 경제는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모택동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모택동은 자신의 부인이던 강청과 사인방, 그리고 임표를 동원하여 문화대혁명을 발동시켰다. 이들은 어린 청소년들을 홍위병이란 이름으로 선동하여 유소기를 비롯한 당시 중국 지도층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유소기에게는 주자파, 즉 자본주의파의 우두머리란 죄목을 씌우고 1966년 자리에서 쫓아냈다. 동시에 유소기를 공산당에서 제명하였고 가택연금을 시켰다. 홍위병들은 유소기의 집을 습격하여 폭행과 폭언을 퍼부었고,  1969년 11월 감옥에서 비참하게 사망했다. 

1980년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후 유소기는 사후에 복권이 되었고 그의 정책은 등소평에 의해 계속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개혁개방의 최초의 시작은 유소기가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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