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를 저술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중국 지도자들이 대화중에 사용하는 이야기들도 사기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다.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역사와 인물,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고사성어 중에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다(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그 의미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정책결정자나 집권세력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유지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게 되고 국민들은 그들의 지지를 유지하거나 철회하는 권리를 가진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그 권력이 유지될 수 있을까? 바로 백성,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먹는 것 지금의 말로 바꾸면 경제적인 여건을 말 할 수 있다. 국민들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경제적 생활이 어려워지면 그 정부를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정권이나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경우에는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현대사에서 대약진 운동시기에 발생했다.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고 개인숭배가 팽배했던 모택동 시기에 그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모택동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스스로의 살길을 모색하는 자력갱생(自力更生)의 모택동식 발전모델을 채택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이상주의와 모험주의의 극치였다. 이전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자신의 오만함에 빠져 현실주의와 괴리된 국민들에게 비극을 안겨준 실험이 중국 땅에서 시작되었다.

1956년 모택동은 자신과 공산당에 대해 지식인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수용한다는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자 다음해인 1957년에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여 모택동과 공산당에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고 숙청하였다.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자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고 비극적인 대약진 운동이 전개되어도 누구도 말 할 수 없었다.

모택동은 산업화의 가장 기본인 기계화보다는 인력에 의존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한 대의 기계가 100명분의 일을 한다면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데, 모택동은 100명으로 한 대의 기계를 대체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였다. 

이 말도 안되는 생각을 바탕으로 초기적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농민들에게 일부 주어졌던 생산물의 자율권을 완전히 박탈하였고 인민공사(人民公社)를 만들었다. 인민공사는 90%가 농민인 중국의 인민을 이용하여 인간의 능력이 기계나 산업화를 추훨할 수 있다는 신념하에서 만들어졌다. 우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인민공사에서는 집단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마치 군대와 같이 생산과 교육, 생활을 함께 하도록 하였다. 

개인의 자율성이 박탈된 상태에서 생산력이 급감했다. 그러나 농민을 지도하던 하급관리나 중간관리는 감히 이 실상을 모택동과 공산당 중앙에 알릴 수 없었다. 생산량을 확인하기 위해서 관리가 나타나면 옆 마을에서 생산한 것을 빌려다가 목표량을 초과 달성했다고 눈속임을 했다. 모택동은 자신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오판하였으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특히 악명이 높았던 것은 마을마다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모아다가 녹여 철을 만들어 무기로 쓰겠다고 한 것인데 그 원시적인 방법은 대약진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용광로의 불을 때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를 다 베었고 농기구도 녹여 없앴기 때문에 정상적인 농업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산이 벌거숭이가 되자 홍수와 가뭄이 덥쳐왔다. 

이 지도자의 무모한 망상으로 1958에서 62년까지 약 2천만명이 굶어 죽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에 굶어 죽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의 정부는 결국 국민들에게 고통과 비극을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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