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항아리에 백합꽃을 한가득 담아 방 안에 놓아두고 그 향기와 모양에 하루를 쉬었다. 초등시절 나의 부모는 흰나리 꽃이라는 백합을 심어 꽃밭을 만들었다.  해마다 칠월이 되면 집 마당 한 켠에 무더기로 피어 하얗게 뿜어내던 유년의 환희는 마음의 고삐로 나를 잡아주고 달랜다.  

한 여름밤을 몰아 풍기는 강렬한 향기와 마당에 드리운 꽃의 그림자는 어린 시선에서 가슴으로 자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선명히 살아있다.  

오늘 출근길에 회사 옆 참깨밭 울타리에 줄지어서 피는 백합을 보았다. 한 줄기에서 가지로 뻗어 희뿌연 봉오리로 살짝 열려 아침 햇살에 조응한다.  반가움에 잊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새록 살아 떠오른다. 내가 백합을 참 아꼈었지, 그렇지만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지! 마음이 사막으로 변할라 염려되는 무의식의 신호인지 내게 온 백합이 고맙고 그립다.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의 옷 그 영광보다도 아름답지 않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믿을 때가 행복이었다.

해가 아직 환하게 남아 있을 때 퇴근하면, 한 밤의 무더위와 긴 저녁 시간과 마주한다. 이 시절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피하다 보니 외식도 만남도 점점 멀어져 가고 혼자 걷기, 혼자 춤추기, 혼자 노래하기에 매달리다가 한 유투브로 철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최진석 철학 선생님의 ‘새 말 새 몸짓’ 이라는 강의를 듣는다. 말씀의 발음이 정확하고 표정은 부드럽고 내게 전달되는 언어에 힘이 있어 매료되었다. 그중 <배려>에 대한 말씀이 다가왔다. 

매너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라, 나를 배려하는 태도의 결과물로 상대방이 배려되는 행동”이라는 새로 듣는 문장이 나의 정신을 깨게 한다. 

이 치열한 삶 속에서 나를 배려하는 태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물의 과정들이 상대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지금부터 내겐 실험이고 숙제이다. 

한여름밤 무더위를 날아서 지금은 흰나리 꽃과 한 말씀이 함께 있으니 그리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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