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고난의 시간이 닥칠 때가 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낙심하고 있을 때, 과거 나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지인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더 초라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모가 복을 빌며 지어준 좋은 이름값도 못한다는 자괴감에 더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베들레헴에 살던 여인 나오미 가족은 흉년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난 후에 처참한 몰골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룻 1:19-22). 10년 만에 나오미를 본 이웃들은 충격을 받는다.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룻 1:19). “아니 이게 누구야? 정말 우리가 아는 그 나오미 맞아?”

이곳을 떠날 때의 모습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변한 나오미를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대신 ‘마라’로 부르라고 한다.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요, ‘마라’의 뜻은 ‘고통’이다. ‘다복’(多福)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자신을 ‘박복’(薄福)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이다. 나오미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다시 한번 절망한다. 

나오미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그는 말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룻 1:21).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나오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계산에 넣지 않고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 자신만만했던 신자가 철저하게 망가지고 난 후에 고백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철저하게 몰락한 자신을 다른 사람 앞에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나오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를 맞았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떠났던 영혼이 부르는 슬픈 노래, 곧 애가(哀歌)이다. 성경은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상한 심령’ 혹은 ‘깨어진 마음’이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진정한 신자의 강한 힘은 여기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겸손한 것이다. 룻기 1장은 나오미가 내뱉는 탄식과 함께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들판으로 장면이 바뀌면서 막을 내린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나오미의 ‘텅 빔’과 추수를 앞둔 들판의 ‘충만함’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룻기 1장은 그래서 희망의 이야기이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라도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만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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