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 있는 중국 돈에는 딱 한 사람의 인물화만 볼 수 있다. 바로 모택동이다. 그리고 중국의 수도 북경의 천안문 광장 벽에 걸린 초상화의 인물 역시 모택동이다. 

중국에서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모택동이 마치 기독교의 십자가 혹은 예수님의 초상처럼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택동 도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중국인의 마음속에 또는 생활속에 신격화되어 있는 것일까? 모택동이 위대한 인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중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이렇게 죽어서도 살아서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피할 수 없다. 

모택동은 1893년에서 1976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그 다음해에 중국의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동아시아의 병부(환자)로 전락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의 상담현이란 곳이다. 호남성 사람들은 옛날부터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성격이 호탕한 사람들이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그는 6살때부터 풀을 뽑고 소를 방목하고 거름을 만들고 땔깜을 베는 등 전형적인 시골아이였다. 그가 글을 배우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을 무렵의 중국은 혁명의 격랑에 휩싸이고 있었다. 

손문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반대하고 한족이 중심이되는 새로운 중국을 만드는 중심에 그는 깊이 심취하였다. 모택동은 친구들과 함께 청나라의 변발을 자르고 호남성의 신군25혼성군에 들어가 사병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새로운 문학을 이끌었던 신민학회에서 간사의 역할도 하였다. 

이후 북경대학교 도서관 관장이었던 이대교를 알게되어 북경대학교 사서로 일하면서 당시 8원의 월급으로 생활하였다. 모택동은 이대교와 당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모택동 자신의 사고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대교와 당시 공산주의의 중국 도입으로 맑시즘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그의 심장에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1919년 모택동은 고향인 호남성의 수도인 장사(長沙)로 돌아와 초등학교 역사 선생을 역임했다. 동시에 호남성의 학회지인 ‘향강평론’이란 잡지를 출간하고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1921년 7월 중국의 지식인들이 소련의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제1차 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모택동도 참가하였고 호남성과 강서성의 공산당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중국 노동조합서기부의 호남 지역 총간사가 되었다. 

모택동은 1923년 중국 공산당이 손문이 만든 국민당과 제1차 국공합작의 와중에 중앙 후보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동시에 선전부 부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 또한 그 다음해에는 상해시 중국 국민당 집행부 조직부 비서 겸 비서처 주임을 맡았고 공산당 내에서는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4년 그는 과로로 병을 얻어 고향인 호남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되찾은 후 다시 혁명 대오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열강을 타도하고 국가의 치욕을 씻어내자’라는 구호로 비밀리에 농민협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고향 부근에 약 20여개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당의 혁명 기초로 삼았다. 동시에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 지부도 만들었다.

1925년 국민당의 국가 주석이었던 왕정위는 중국 국민당 중앙 선전부 대리 부장으로 모택동을 임명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중국 국민당 중앙농민부 농민운동강습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농민운동과 중국 혁명에 있어서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강습소를 지도하면서 농민운동의 간부들을 육성했고 상하이 중앙노동운동 위원회 서기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기층으로부터의 교육은 모택동이 중국 혁명에 있어서 공산당이나 혹은 소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농민을 동원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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