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에서 ‘운명’을 검색했다. 맨 처음 뜨는 것은 무당과 점집 광고 사이트였다.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하면 우선 무엇을 생각할까? ‘운명’(運命)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이란다. 운명이니 팔자소관이니 하는 말을 할 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버린 어떤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바로 이런 운명론에 가까운 것 아니냐고 묻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존폐(存廢)를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운명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믿는다. ‘섭리’(攝理)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에 따라 이 세상을 보존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당하는 그 모든 것 즉, 성공이든 실패,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등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이 작용한다고 신자들은 믿는다. 

기계적 운명론과 하나님의 섭리신앙의 차이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세계 역사와 같은 ‘제2의 요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점이다.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떤 다른 요인들 없이 기적적으로 살리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의사나 약물이라는 2차적인 요인들을 적절히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그래서 질병으로 시달리면서도 병원을 찾지 않고 약물도 거부하며 기도만 해서 낫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을 제 멋대로 제한하는 교만한 범죄행위가 된다. 불치병이 기적적으로 나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병원에서 치료받거나 약을 먹고 나으면 감사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노예로 팔려 이집트에 끌려가서 온갖 고생을 하고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있다. 요셉이 총리가 된 다음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만나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비록 형들은 동생이 미워서 노예로 팔아넘긴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악한 의도까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소용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맞닥뜨린 삶의 환경들 모두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난의 때,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지날 때에도 잠잠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살아간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 장래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주어진 길을 성실히 걸어간다. 그리고 기도한다. 만일 모든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 운명론이라면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하는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도 결정하시는데, 그것이 신자의 기도요 순종이요 믿음이다. 그것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은 섭리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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