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변도(一邊倒)’라고 하는 단어는 한쪽으로 치우치다 혹은 한쪽으로 경도된다는 뜻이다. 1945년 8월에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으나 국제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갈라서면서 전쟁 후 유럽에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길게 드리워졌다. 베를린에는 한 도시안에 높은 장벽이 만들어지고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 되었으며, 동북아의 한반도 역시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의 자본주의 진영과 북쪽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모택동의 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이 이데올로기와 주도권을 두고 국내 전쟁이 벌어졌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던 1921년부터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였다. 비록 손문의 민족주의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모두 포용하였으나 그가 간암으로 죽으면서 민족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고 대립과 갈등을 지속해왔다. 

장개석의 부패와 오만은 결국 모택동의 공산당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겨나게 했으며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전쟁기간 동안 공산당에 대한 군수품을 지원하였고 국제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최초로 승인하였다. 

한편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지하고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국민당만을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9년 6월 전세가 완전히 기울게 되자 ‘일변도’정책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모택동은 새로운 외교정책을 발표하는데 그 핵심이 대소일변도 정책이었고 동시에 지금까지의 중국의 모든 관계를 백지화하고 새롭게 관계를 형성하겠다고 하였다. 중국어로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손님을 새로 받겠다(打掃幹淨屋子再請客)” 라는 말로 기전의 장개석이 맺은 모든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당시 폐허가 된 중국에게는 안전과 경제적인 문제를 도와줄 세력이 필요했고 그 대상을 소련과 사회주의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공산화에 소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소련과 같은 길을 가고 소련을 롤 모델로 삼았다. 모택동은 “중국은 제3의 길이 없다, 오로지 소련에 의존하는 길만이 있다”라고 수차례 강조하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모든 시스템은 소련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중국에서 소련과의 우호적 관계 시기에 지어놓은 건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제모델, 정치 시스템, 교육 제도, 공무원 제도 등을 소련으로부터 도입했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1949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두 달만에 모택동은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고 중소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모택동을 무시했고 그와의 협력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에 격분한 모택동은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스탈린을 위협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모택동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미국과의 경쟁에서 중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스탈린은 모택동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고 동시에 약 3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대소일변도 시기에 중국은 소련을 형님으로 모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의 중국의 참전 역시 소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소련은 중국에게 만주에서 소련까지 이어지는 동방철도의 권리를 돌려주었고, 1955년에는 대련항의 권리를 중국에게 돌려주었다. 

대소일변도 시기 중국은 소련으로부터의 원조에 힘입어 건국 초기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오늘의 소련이 내일의 중국이라고 하면서 소련 배우기에 열을 올렸다. 또한 스탈린이 사망하자 전체 중국에서는 조기를 게양하고 묵념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중국과 소련은 견원지간처럼 무력충돌까지 하는 적대적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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