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이 중국에서 장개석을 몰아낸 후 대륙 곳곳에 남아있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급급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던 한반도의 상황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철수시켰고, 다음해인 1950년 1월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2차세계대전 이후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일본의 오키나와와 필리핀까지라고 선언하고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최소화 하였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과의 협의없이 1946년에 일방적으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하여 토지개혁과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개시했다. 유엔은 북한이 고의적으로 참여하지 않자 할 수 없이 1948년 2월 남한만 단독 총선거를 실시했다. 북한은 자신들만의 선거를 통해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여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를 수립시켰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철수를 요구하였고 동시에 소련도 1948년 12월 철수하였으나 이미 만주에 있던 조선군 의용군 부대를 북한에 귀국시켜 군대를 정비했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기갑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모택동이 장개석을 몰아내는 것에 고무되어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수용하면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모택동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김일성은 5월 13일 박헌영과 함께 모택동을 면담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스탈린은 5월 14일 모택동에게 긴급 전보를 보냈고 그 내용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지만 중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침략을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5월 15일 모택동은 김일성과 구체적인 회담에 돌입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전쟁에 동의하였으나 중국군은 전쟁에 미군이 개입할 경우에 한해서 참전하겠다는 조건부 약속을 하였다. 소련과 중국의 전쟁 허가를 받은 김일성은 평양으로 돌아와 전쟁 준비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5월 말에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와 무기를 거의 다 인수 받았고 이를 기초로 6월이 되면서 곧 다가올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38선 북쪽 10킬로 지역으로 인민군을 배치하였고 6월 25일에 전 전선에서 남침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파들간에 서로 불신이 팽배했고 여러개의 정파들이 서로의 이익에 몰두하여 정국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동시에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과소 평가하고 만약 소련과의 3차세계대전이 발발할 경우 주한미군이 이를 막아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소련과 한반도는 연결이 되어 있지만 미군의 경우 태평양을 건너와야 하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미군은 한국과 대만을 포기하고 일본과 필리핀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북한과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남한간에는 이미 군사적 실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고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등의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당시 비정상적인 것은 대통령 뿐만 아니라 신성모 국방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북침을 하겠다고 떠들었고 미국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를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도 압수해버렸다. 6월23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북한이 남침을 한다고 보고했으나 신성모는 이를 무시하고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에게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고 6월 25일에는 국군 병력의 절반을 휴가외출을 보냈다. 

전쟁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였고 당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에 대해 남한정부는 아무런 준비없이 큰 소리만 치다가 결국 우리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한국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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