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이 비록 모택동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국민당 정부를 이전하였으나 한국과의 유대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45년 11월 장개석은 자신의 부인인 송미령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서 한국으로 귀환하려는 김구 선생을 초대했다. 

이 전별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한국 독립당 간부와 각계의 요인 2백명을 초대했고 당시 미화 20만달러를 김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의 영향력이 한국에 미칠 것을 우려하여 김구 등을 개인적인 자격으로만 귀국하도록 하였고 20만 달러도 국내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1949년 중국 본토를 상실한 장개석은 12월 8일 중국을 떠나 타이완으로 이주하였고 그는 공산당 보다 훨씬 더 우월한 상태에서도 패배한 것에 대해 통렬히 반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반성은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우선 그는 타이완으로 옮겨온 후 국민당 조직을 개편하였고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며느리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부패에 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국민당이 중국에서 패배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세력이 부패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타이완에 자리 잡은 장개석은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미소 냉전의 굴레에서 본격적으로 친미 정책을 시행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자 그는 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이승만 대통령을 타이완으로 초대하여 정상회담을 가졌고 반공전선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미국 역시 소련과 중국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략적 원조를 시작했으며 동시에 1955년에는 미국이 중화민국과 타이완의 안전을 담보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 타이완은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 

타이완은 1590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 섬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섬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포르모사’였고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포르모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네델란드 사람들이 들어왔고 이어서 스페인 사람들도 들어왔다. 이 두 세력간에 분쟁이 있었고 스페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네델란드가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한 후 정성공이 타이완으로 들어와 또 이들을 몰아내고 청나라에 저항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후에 청나라에 다시 편입이 되어 중국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일본에게 만주와 타이완을 할양하였다.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된 것이 1910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타이완의 일본 식민지 기간은 약 50년이나 되어 많은 부분이 일본화되었다.

해방 후 중국에 다시금 반환된 타이완에는 이제 장개석의 국민당이 진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세웠다. 국민당의 정부와 군인들은 토착 타이완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치 자신들이 정복자처럼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타이완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원래의 원주민들은 산으로 쫓겨나 고산족이 되었고, 명나라 말기부터 복건성 등에서 일찍이 타이완에 온 한족들은 본성인으로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었다. 또 한 부류가 외성인으로 바로 장개석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본성인들의 수가 훨씬 많았음에도 장개석의 외성인들은 이들을 무시했고 정부의 요직에는 외성인들이 차지했다. 외성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는 중에 1947년 2월 28일에 228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당시에는 폭동으로 간주되었으나 지금은 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 되었다. 

장개석은 우여곡절 끝에 비록 타이완에서이지만 최고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권력을 자신의 아들인 장경국에게 물려주었다.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해 1971년 유엔에서 타이완은 축출당했고 1975년 타이베이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제 타이완은 국민당이 아닌 본성인이 중심이 된 민진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조금씩 장개석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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