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 접어들면서 세계 곳곳에서 피를 뿌린 잔혹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해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장개석이 이끌던 중화민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마지막까지 그 야욕을 버리지 않고 저항하였다. 결국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탄인 원자폭탄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그리고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하였다. 바로 그날 소련군이 만주국을 공격했다. 이때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1945년 9월에 정식으로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하려고 하였으나 그 전에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초래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겪었던 한국 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그리고 타이완 등이 독립되거나 귀속되었다. 우리에게는 통일된 한국의 절호의 기회가 있었으나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신의 영향력을 주장하며 남북한으로 분리 점령하여 지금까지 분단 국가로 남아있게 되었다.   

소련은 중국의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있었고 이를 위해 자신을 따르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고 있었다.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난 후 결국 두 마리의 호랑이가 중국에 남겨지게 되었다.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과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이 서로 중국을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많은 일본군이 중국 각지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은 자신의 국민당이 합법적 정부이므로 일본군에게 자신들이 접수 할 때까지 공산당군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에 불복하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화북지역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자신들의 점령지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북쪽은 공산당이 남쪽은 국민당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각자의 속내를 감춘 채 45일간이나 중경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서로 내전을 피하고 평화적 국가 수립을 희망하며 미래에 함께 하자고 말은 하였으나 이미 곳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무력 충돌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미국의 트루먼은 마샬 장군을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였다. 미국과 영국, 소련 등의 중재와 압력으로 양측은 내전 중지와 민주적 통일 정부를 수용하는 듯 보였다. 

1946년 1월에 미국의 마샬 장군과 국민당, 그리고 공산당의 각 대표로 구성된 ‘군사 3인위원회’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중지협정’을 체결했다. 이어서 통일정부 수립, 국민대회 개최, 군사제도 개혁, 평화건국 강령, 헌법 초안 등을 채택하고 통과시켜 마치 평화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냉전이 빠르게 전개되면서 그 협정들은 금방 빛이 바래졌다. 장개석은 국민당이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하였다. 

소련은 만주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일본군의 무기와 자신들의 무기를 공산당에게 지원하였고 공산당은 만주의 농촌 지역을 장악하고 대도시도 점령하였다. 이에 국민당은 만주지역에 대해 1946년 6월 국민혁명군의 이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공산군의 거점지역을 점령하고 중국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공산당군과 내전에 돌입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제 중국을 누가 손에 쥘 것인가를 두고 마치 유방과 항우의 전쟁과 같이 최후의 결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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