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23일에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여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해지자 많은 한국의 기업인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이 초기에는 심양(瀋陽)으로 많이 진출했다. 심양이 가지는 지리적 특징은 중국의 동북3성인 랴오닝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진출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고 동시에 동포들이 많이 살아 언어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심양 공항은 지방의 낙후된 공항이었고 한국인을 마중 나온 동포들은 공항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공항 근처는 시끌벅적한 연변 사투리와 한국어 그리고 중국어가 뒤섞여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심양의 원래 이름은 봉천으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나 일제를 혐오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건너와 살고 있었다. 1920년대 말 봉천을 지배하던 인물은 장작림(張作林)이라는 마적출신의 군벌이었다. 그는 동북 3성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장개석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관계를 맺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 지역을 직접 통치할 것을 결정하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부담스러웠던 장작림을 심양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기차를 폭파시켜 살해했다. 이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꼭두각시 황제로 앉혀놓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잃은 장학량(張學良)은 일본과의 직접적인 대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병력을 데리고 국민당에 협력하여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는 마지막 퍼즐이 되었다. 

이후 장개석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학량을 공산당 토벌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북군에게 공산당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장학량과 그의 부하들은 장개석이 당연히 일본과 싸워줄 것을 기대했는데 일본과는 싸우지 않고 비록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같은 민족을 공격하라고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장학량은 1936년초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 공산당의 군대와 비밀리에 접촉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은 중국군 총사령관과 행정직 주석을 겸하고 있어 권력 최고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항일 투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도 장개석은 ‘선통일, 후항일’을 주장하였고 장학량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이 두 사람간에는 불신의 벽이 쌓이기 시작했고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공산당 토벌을 압박하기 위해 서안으로 향했다. 

당시 서안에는 크게 두 개의 병력이 있었다. 하나는 양호성의 4만명에 달하는 서북군이었고 또 하나는 주력인 장학량의 동북군이 있었다. 1936년 12월 7일에 장개석이 서안에 도착했는데 12월 9일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 시위가 열렸고 장개석의 헌병대가 발포하여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장학량이 학생들을 겨우 무마하였다. 

장개석이 장학량을 경질하고 동북군의 장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장학량은 12월 11일 밤 동북군과 서북군의 장교들이 모여 쿠데타를 시도했다. 다음날 12월 12일 장학량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장개석을 체포하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요구했고 이를 수락하자 장학량의 14만명과 서북군 4만명, 공산당 군 9만명으로 ‘항일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중일간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때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연합하여 일본과의 투쟁을 계속했다. 

한편,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체포되었고 1949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패주하면서도 장학량을 끌고 갔으며 이후 1991년까지 가택 연금을 하였다. 이후 1993년 출국이 허가되었으며 미국으로 출국하여 2001년 103세에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거주하였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시안사변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세력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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