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중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러시아의 농부 바흠인데, 그는 적은 금액을 지불하면 하루 종일 다니면서 표시한 만큼의 땅을 준다는 마을에 간다. 단 한 가지 조건은 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돈만 날리게 된다.

주인공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시작해서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식사도 휴식도 포기한 채 더 멀리까지 갔다. 해는 중천을 넘어 기울어져 갔고, 돌아가야 할 길이 다급해진 그는 출발 지점을 향해 내달렸다. 다행히 해지기 직전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에게 필요한 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힐 땅이면 충분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에게 얼마나 더 많이 벌면 만족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보다 조금만 더!”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투기문제로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인가? 땅이 막대한 돈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개발될 일이 없는 오지라면 하등 문제될 일도 없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줄만한 집이, 땅이 없어서 불행하다. 사실 아직 ‘땅’을 딛고 사는 우리로서는 발 디딜 ‘땅’이 절실하다. 그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동일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잊지 말 것은 그 모든 것이 영원한 안식처를 향한 여정 중 잠시 동안의 필요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태도가 요구된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린도전서 7:30-31). 이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데 유용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여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좋다고 정작 가야할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마냥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학자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땅 있음의 시대와 땅 없음의 시대”로 구분했다. 땅 없음의 시대에 이스라엘백성의 신앙은 더 절실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족했을 때보다, 부족하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더 하나님을 의지했다. 성경은 말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이번 주간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이다.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마태복음 8:20).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처를 찾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고 구원을 이루셨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진정 어디에 마음 붙이고 살아야 할까? 고난주간에 이 질문 앞에 다시 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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