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중정기념당이다. 타이완의 수도 타이페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후 타이완에 중화민국을 수립했는데 그가 죽은 후 중정기념당을 만들었다. 광대한 부지와 엄청난 대리석을 사용해서 만든 이곳은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기념당의 주인공인 장개석은 청나라 말기에 태어나 엄청난 풍운을 겪으면서 일대 호걸로서 삶을 영위했다. 장개석은 1887년 중국의 유태인 상인이라고 하는 닝보우 지역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소금을 판매하는 염상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의 모친은 자식 교육에 엄격하였고 장개석 또한 어릴때부터 영민하여 8살 때 대학과 중용을 공부했고 역경과 좌전을 공부하였다. 좀 더 성장하여 17살이 되면서 그는 손문의 민족주의 사상을 습득했고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학문을 접하면서 혁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1907년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면서 청나라에 반대하고 새로운 중국을 만들려는 이상을 가지고 손문이 세운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지휘하면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 손문이 그를 신임하여 옆에 두었다.

1923년 손문과 그의 부인 송경령을 암살의 위기에서 구해냈고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한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의 군대를 연구하고 돌아와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손문과 의기투합하여 중국의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장개석이 초대 총장이 되면서 중국 국민당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엘리트들도 이 학교를 통해 배출하였다. 동시에 황포군관학교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 군인세력을 양성했기 때문에 장개석이 향후 중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그 밑거름이 되었다.

1925년 북경에서 손문이 간암으로 사망하자 국민당 내부에서는 이후의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장개석은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반대 세력과 공산당을 숙청하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장개석은 전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 즉 통일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이 되어 세 개의 군대를 편제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이 와중에 공산당이 앞으로 자신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직감하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공산당을 소탕하고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 제거 운동을 시작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장개석은 수도인 북경을 함락시켰고 만주 지역의 마지막 남은 군벌인 장학량의 군대를 복속시킴으로서 청나라 이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그는 국민당의 깃발아래 국민정부를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만들었다. 

장개석은 그 와중에 당시 중국내에서 유력 가문인 송자인의 둘째 딸인 송미령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세 번째 결혼으로 송미령은 손문의 부인인 송경령의 동생이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변질되게 되는데 원래 손문은 중국에 민주주의와 헌법에 의한 주권재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장개석은 당시 군벌의 문제, 공산당과의 대립, 일본의 지속적인 침략을 이유로 독재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중국의 황제제도에서 유지되던 유교에 의한 통치를 지속시켰고 또한 자신이 권력의 최정점에서 독재를 실시했다. 심지어는 정보기관을 만들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암살하거나 고문하는 등의 일을 자행하여 지식인이나 당시의 지도자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민들에게는 청렴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주변은 부패에 물들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장개석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당시 얼마되지 않는 공산당을 섬멸하는데 실패하여 이후 주도권을 공산당에게 빼앗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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