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인접하고 있는 중국 산동성의 칭다오에 가면 몇 개의 관광코스가 있는데 그 중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 5.4광장이다. 이 광장의 기념물은 붉게 타오르는 횃불의 형상을 하고 있고 앞으로는 해변이고 뒤쪽에는 칭다오 시청이 있다. 

칭다오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은 한국에서도 자주 마시는 칭다오 맥주이다. 칭다오에 있는 맥주 박물관을 견학해보면 당시 독일의 기술과 산동성의 맑은 물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도 그 맛이 상당히 좋아 국제 대회에서도 상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 청도에서 발생한 5.4운동은 1919년 5월 19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중운동을 일컫는 말이며 중국의 현대사의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원세개에 의해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국제정세도 여전히 중국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서 18년까지 발생하였고 이 기회를 틈타 일본이 산동성을 점령하였다. 원래 산동성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함으로서 중국에서의 모든 이권이 포기되었다. 

1차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당시 원세개에게 21개조항을 요구하였고 그 대가로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는 것을 지지해준다는 밀약이 있었다. 그러나 원세개가 죽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은 당연히 중국에게 산동성을 돌려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원세개와의 조약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 등의 연합국에게 산동성의 일본 점령을 동의받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승낙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이 중국에게 알려지자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분노하며 천안문에 모여 들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에는 17개 대학을 대표하는 3천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상품배척과 국산품 애용등의 구호가 외쳐졌고 많은 시민들이 이에 동참했다. 

중국 정부는 약 1200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였으나 이들의 저항을 막을 수는 없었다. 5.4운동의 영향은 사방으로 번져나갔고 2주만에 중국의 대도시들이 동참하여 약 200개의 도시에서 시위가 진행되었다. 특히 상하이에서는 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자진하여 가게를 휴업했고,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진행하여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5.4운동은 비록 일본의 산동성에 대한 무단 점령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으나 중국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고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5.4운동 이전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미래를 서구의 민주와 과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친서방적 사고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5.4운동을 통해 중국인들은 서구에게 실망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신해혁명을 일으켰던 손문은 1919년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바꾸고 민족주의에 바탕한 정치체제를 모색했다. 그는 서구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과도 협력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중국과 경계를 두고 있던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에서 중국의 미래를 찾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에 공산주의 혁명세력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칭다오에서 시작한 5.4운동은 결국 서구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현재의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5.4운동을 중국 현대의 출발점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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