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필자가 근무했던 회사에서 겨울 수련회를 했을 때의 일이다. 스키장에서의 야외 활동을 마치고 리조트 숙소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1층 승강기 앞에 몰려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지금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승강기 문 바로 앞에 있었다. 승강기가 도착하여 문이 열리는 순간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그 승강기에는 당시 아주 유명했던 농구선수들 여럿이 타고 있었는데,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필자가 본 것은 200센티에 가까운 농구선수들의 가슴팍이었다. 순간 놀라서 머리를 치켜뜨고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본 그들의 신장은 정말 장대했다. 문 앞에 가득 몰려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면서 농구선수들끼리 자그맣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웬 잡초들이 이렇게 많아?”... 그것은 키 작은 우리들을 비하하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주눅이 들어서 그 당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사실 그다지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그냥 신기할 따름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들은 왜 우리들을 잡초에 비유했을까? 아마 키가 큰 그들의 눈에는 로비에 가득 모여 있는 우리들의 머리통이 오밀조밀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들 눈에는 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170센티미터의 신장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평생 그 높이로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200센티미터의 신장으로 사는 사람이 경험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 어렸을 적 보았던 학교의 책걸상이 어른이 되어서는 아주 작게 보이는 것과도 같은 이치일 듯하다. 주변 사람들 중 안과에서 라식 수술을 하고 난 다음에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소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보는 세상이 다르다. 색맹인 사람과 색맹 아닌 사람이 보는 세상도 다르겠지. 

우리는 보통 내가 보는 세상, 내가 보는 관점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 다른 사람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옛 속담에 ‘장님(시각장애인) 코끼리 만지기’가 있다. 부분적으로 경험한 것만으로 판단할 때 전체를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상대방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있다. ‘곰’이란 글자는 반대편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문’이 된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달라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 그때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후회할 때가 있다. 내 입장만 생각하다가 뒤늦은 후회를 한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있을 듯싶다. 

하지만 점점 그런 실수를 줄여가야 할 것이다. 혹시 상대방이 지금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헤아려 아는 지혜와 성숙함이 필요하다. 소중한 관계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 그나마 서로 이해와 용납으로 품어줄 수 있다면 좀 숨통이 트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오늘 내가 만난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뭘까?”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