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주(周)나라 시기부터 천하의 개념을 도입하고 주나라의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면서 세계의 중심에 중국을 가져다 놓았다. 이후 춘추전국 시기를 거쳐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의 제국을 만들었다.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중화주의가 완성되었고 주변의 국가들이나 지역은 오랑캐로 여기고 동이, 서융, 북적, 남만으로 세계를 구분하였다. 이후 중국은 수차례의 분열이 있었으나 다시 통일왕조가 형성되어 수천년간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여기에는 한족이든 또는 오랑캐라고 부르던 유목민족이든 상관없이 중화체제라는 틀 속에서 작동되어졌다. 

이러한 중화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전혀 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던 유럽에 의해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을 내부에서 흡수해 낼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손문이 만든 동맹회가 주축이 된 신해혁명은 청나라의 마지막 호흡을 끊어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손문이 신해혁명을 성공시키고 대총통에 취임하였으나 아직 군사력이 청나라 왕조를 붕괴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원세개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 자신의 소유의 바오딩 육군군관학교에서 7만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북양군을 지휘하여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청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손문의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본 원세개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게 된다. 청나라 황실은 이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원세개에게 총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평정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손문등의 세력과 결탁하여 청나라를 붕괴시키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2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푸이였다. 그는 1906년에 태어났고 1908년에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서태후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원세개는 당시 손문과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대총통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한다는 조건으로 적극적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가담하기 시작했다. 원세개의 음모를 몰랐던 청나라 황실은 원세개에게 전권을 주고 남경 임시정부와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원세개는 이를 이용해 황제의 퇴위를 획책했고 1912년 2월 황제가 퇴위하더라도 우대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청나라를 협박했다. 드디어 2월 12일에 황제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고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함으로서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청나라의 멸망은 바로 중화제국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몰락과 공화체제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갈등의 소용돌이속에 갇혀있었다. 원세개는 손문으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빼앗고 황제를 퇴위 시키고 그 권력을 모두 자신이 장악하였다. 

중화민국 총통이 된 원세개는 이제 자신의 야심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시 황제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1915년 12월에 황제제도의 부활을 선언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1916년에 국호를 중화민국에서 다시 중화제국으로 고쳤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바로 국내외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즉위하자마자 퇴위하였고 이후 3개월만에 사망했다. 

원세개는 조선에 와서도 많은 행패를 부린 인물이었으며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공화제의 성립도 반대했던 중화제국 말기 최악의 인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곳이 바로 지금 서울 명동의 중국 대사관과 화교학교 자리였다. 

중화제국의 몰락은 오랫동안 중국을 혼미의 시대로 만들었고 그 시기는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나서야 오늘의 중국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때 까지 중국은 또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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