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가 붕괴되어 가던 무렵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인 손문(孫文)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손중산(孫中山)으로 불리우며 1866년 중국 광동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가난을 탈피하고자 어렸을 때 마카오에 건너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큰 형이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13살이 되던 해에 형이 있는 하와이로 가서 미국식 교육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홍콩으로 왔다. 홍콩에서는 서양의학을 공부하면서 중국의 청나라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후 그는 이홍장에게 편지를 써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흥중회’라고 하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혁명만이 중국과 중국인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1차 혁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바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탈출하여 망명하였다. 

손문은 일본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을 다니며 매일 독서를 하였고 자신의 사상인 ‘삼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삼민주의는 민족, 민권, 민생의 세 개의 민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민족은 중화민족의 독립을 상징하고 민권은 주권재민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민생은 국민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00년에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자 중국으로 돌아와 다시 혁명을 시도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혁명이 거듭된 실패에도 손문은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혁명단체를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동맹회’이다. 

손문은 해외를 다니면서 일본, 하와이, 베트남,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삼민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필리핀, 프랑스, 독일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동맹회를 만들었다. 

청나라 정부의 끝자락에서 손문의 지속적인 혁명은 비록 수십차례나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는 뜻을 좌절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손문은 자신의 혁명 신념을 꺽지 않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동맹회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망치로 바위를 아무리 내려쳐도 처음에는 부서지지 않지만 그 힘이 압축이 되어 터져나오면 순식간에 부서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십번의 혁명 실패에도 그 힘은 압축되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에서 독자적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그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는 철도부설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가 민간이 부설한 철도를 강제적으로 빼앗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정부에 항의하고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정부는 무한에 있는 군부대에 이들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무한의 군대에는 동맹회 회원들이 섞여있었고 동맹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켜 군대를 접수하고 자신들을 호북군 정부라고 호칭했다. 

이 동맹회가 혁명을 일으킨 날이 1911년 10월 10일이었는데, 이를 신해혁명이라고 했으며 이날이 10월 10일이어서 대만에서는 ‘쌍십절’이라고 하여 지금도 매년 기념식을 가지고 있다. 동맹회의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마치 하나의 불씨가 넓은 들판을 태우듯이 중국 전체로 혁명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혁명이 일어난지 2달도 되지 않아 중국의 17개성이 청나라와 결별을 고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또한 그해 12월 초에는 남경을 함락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혁명 당시 손문은 해외에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에 가있었고 이 소식을 접하자 바로 중국으로 귀국했다. 손문은 열강들과 교섭을 통해 열강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한편, 자신은 12월 29일에 남경에 돌아와 총통선거를 거쳐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912년 손문은 1월 1일 임시총통으로 취임하였고 대만에서는 이날을 민국 1년으로 계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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