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洋務)’란 뜻은 ‘서양의 것을 힘써 배우다’라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의 수천년간의 역사에서 그 많은 이민족들이 중원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점령하거나 통치한 적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들었다. 

 
중화(中華)라는 말과 같이 문화적인 우월감에 다 동화되어야 하는데 이번 노랑머리의 오랑캐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거나 따르지 않고 있는 것에 의아심을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지배자들은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서양에게 패배한 것은 문화적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뛰어났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바로,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서양의 무기만 도입한다면 이들을 금방 물리칠 수 있고 중국 중심의 세계가 유지될 것이라는 무지한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쨌든 청나라는 이러한 오랑캐들을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무운동’이다. 
 
양무운동은 1860년에서 1894년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하게 되는 청일전쟁 때까지 약 30년의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한다면 이들은 서양의 하드웨어(hard ware)만 모방했지 그 내면을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다. 
 
서양을 모방해야 한다고 한것은 위원이라는 사람이 아편전쟁 직후 ‘해국도지’란 책을 써서 서양의 장점을 배워야 서양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다가 태평천국의 난과 서양의 지속적인 침략이 이어지자 비로소 양무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양무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청나라 정부가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던 증국번과 이홍장, 그리고 좌종당 등 지방의 한족 관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군사적 실력이 중국보다 훨씬 더 월등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고 청나라 정부의 지원하에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몰두 하였다. 
 
즉 양무운동은 중국이라는 원래의 몸통은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서양의 것을 이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과 적의 것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이 적용되었다. 초기에는 증국번이 양무운동을 주도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이홍장이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우선 상하이에 ‘강남제조총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배와 탄약, 총과 대포 등을 만들었고 난징(南京)에는 금릉기기국이란 것을 세워 대포와 화약 등을 생산했다. 또한 이홍장은 바다에서 적을 이겨내기 위해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북양함대와 남양함대, 그리고 복건함대를 만들어 중국의 북쪽에서 남쪽까지를 지킬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하였다. 
 
명나라 중엽부터 아편전쟁까지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이제야 해군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에 중국이 만든 군함은 아직도 조악한 상황이어서 영국과 독일에서 군함을 수입하였고 또한 수사학당과 무비학당을 설립하여 해군의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선생을 초빙해서 서양식 군사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일명 증국번과 이홍장 등의 양무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이들은 만주족이 아니라 한족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관리와 감독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서태후가 전체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태후의 권력의 유지가 국가의 부강보다 더 우선하고 있었다. 
 
결국 양무운동은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복건함대가 전멸하게 되고, 청일전쟁으로 북양함대가 전멸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청나라의 부국강병과 중체서용의 노력은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그 결과는 청나라를 파멸로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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