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태후이다. 아마 서태후라는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베이징의 유명한 관광지인 이화원을 만든 사람이다. 서태후는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데 청나라 9대 황제였던 함풍제의 후궁이었고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였고 황실의 권력을 독차지 하고 전횡을 휘둘렀다. 

 
중국의 역사에서 3대 악녀를 이야기 할 때 서태후도 빠지지 않는다. 첫 번째 악녀로 소문난 사람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부인 고황후가 있다. 그녀는 유방이 죽고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황후의 아들을 독살하고 척황후는 산채로 손발을 자르고 벙어리로 만든 후에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를 만들고 눈을 뽑은 후에 돼지 우리에 던져서 죽게하였으니 얼마나 악독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황제에 오른 고황후의 아들도 주색에 빠져 죽어버렸으니 권력욕과 질투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려주는 사례이다. 
 
둘째 악녀로는 당나라 시기의 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원래 당고종의 후궁이었는데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목졸라 죽이고 황후인 왕씨가 죽였다고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이후에는 왕씨를 백대의 곤장을 치고 다리를 자르고 항아리에 가두어 죽도록 하였다. 
 
또한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죄를 씌워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이홍을 앉혔으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독살하고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둘째 아들이 황제가 되자 이번에는 그 아들을 또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을 황제에 올렸다가 역시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황제가 된 경우였으며 자신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렸다. 
 
이 두 명의 악녀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서태후이다. 서태후는 원래 후궁에 지나지 않았으나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 태자의 생모로 황후와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원래의 황후는 동쪽에 살고 있어서 동태후였고 서태후는 서쪽에 살고 있어서 서태후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동태후가 계단에서 굴러 뇌진탕으로 사망했는데 서태후가 암살했다는 설이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서태후는 사치로 유명했는데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낭비와 사치를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서태후는 특히 음식에 식탐이 있었는데 한 끼에 128가지의 요리를 먹었으며 그 비용은 일반인 한 사람이 일년치 먹을 만큼의 비용이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음식을 세 번 이상 먹지 않았다고 하며 지방을 순시할 때는 요리사만 100명이 따라 다녔다고 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 열강에 의해 중국이 침략당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자신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있었다. 
 
옷은 3000벌이 넘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으며 온 몸에 비단과 구슬, 진주등의 장신구를 가득 달고 다녔다. 서태후의 옷과 신발을 만드는데 약 3천명이 동원됐고 매년 1만냥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늙어서는 미용을 위해 매일 산모들을 불러 신선한 모유를 빨아 먹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서태후가 악녀가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위에서 말한 이화원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중국의 함대는 북양함대로 재편되어 동아시아에서는 최강의 해군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해군의 발전을 위한 포탄과 전함을 구입해야 하는 비용중 3천만냥을 빼돌려 자신의 놀이터였던 이화원을 짓는데 사용했다. 당시 그 비용은 청나라 1년 예산의 약 30%였고 군대는 비용이 없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그 와중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멸망의 길로 빠르게 진입하였다. 한 여인의 권력욕과 사치와 낭비가 국가를 망치는 순간이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