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세월을 벗어 던진 겨울나무의 자태는 고고하다 못해 고귀하게 보인다.

 
무성했던 여름의 치장 들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용기가 감탄스럽기도 하다. 봄의 정기가 가지 끝까지 차오르도록 인고의 시간과 열정을 생각하면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살을 저미는 통증과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을 터이지만 다가올 한파에도 당당 하게 맞서리라 다짐하면서 미련 없이 훌훌 벗어 버리고 홀로 선 겨울나무!
 
세월의 시름을 잊지 못하고 서로의 탓 이라고 우격다짐을 하던 어리석었던 날들을 생각하니 사람이라서 미안함이 많다.
 
세상 모든 욕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봄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뾰족한 눈을 비비면서 기지개를 켠 후 푸른 잎이 무성 할 때 일까?  꽃을 피우고 웃고 있을 때 일까? 갈색의 무늬로 채색되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세월의 가치를 평가하는 때 일까? 아니면, 미완의 세월이지만 더 추워지기 전에 허욕을 버리고 가벼워 질 준비를 할 때 일까? 어쩌면 완전히 내려놓고 빈 가슴을 내밀어 가냘픈 가지들만 펼쳐 들고 있을 때가 아닐까 싶다. 
 
깊은 상념에 시간을 저울질 하다가 길고 짧음에 연연하지 말자던 겨울 햇볕이 포근해 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긴긴 겨울 밤 두 팔을 힘껏 벌려 온몸으로 삭풍을 견디어 내고 서있는 겨울나무를 바라보면서 자연속의 욕심에 마침표를 찍어 보려 한다.
 
동토의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 끝자락에 걸친 긴 가지 끝까지 수분을 빨아 올려 새로운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복잡 다난한 계산으로 인고의 겨울을 견뎌야 하는 겨울나무의 월동은 가을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왕성한 물줄기의 몸집을 줄여 가야하는 난해하고도 미묘한 공식을 풀기 시작하여 하루아침에 잎들이 시들지 않고 서서히 가을 햇살에 익어가도록 수분공급량을 줄여 가기위해 뿌리의 역할을 조정하여야 한다. 옛 문헌에 이러한 때를 일러 귀근지시(歸根之時)라 했다.
 
뿌리의 기능을 되돌려 다음을 준비 하도록 땅속 깊이 감추는 시기라는 뜻 이다. 그로인해 서서히 수분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엽록소의 퇴색으로 갈색의 변신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암시 하는 것 이다. 비로소 정든 가지를 두고 낙엽이 되어 사명을 다 하면 미련 없이 낙하를 자초하여 뿌리 주변을 덮어 뿌리를 보호하고 결국엔 부토가 되어 자양분으로 또 다른 봄의 유전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나도 흡사한 나무와 잎사귀들의 일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이제 왕성했던 어제가 있었다면 잠시 발을 멈추고 겨울나무가 내년을 준비하듯 욕심의 낙엽들도 내려놓고,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지혜와 계책도 잠시 발 아래로 내려두고, 마치 비어 있는 듯 빈 가슴을 열고 허공에 양 팔을 맡기고, 질풍 같던 시기의 물줄기도 잠시 감춰 둔 채로 저 겨울나무처럼 당당해 졌으면 어떨까 생각 해 본다.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겨울나무 하나를 택해 양손을 활짝 벌려 등을 기대고 서본다. 봄부터 들려오던 소리들이 세월을 거슬러 뒷걸음질 치듯 뾰족해 짐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추워진 요즘 장고에 든 겨울나무처럼 숙연해 지고 싶어진다. 오히려 겨울나무로 당당해 지고 싶다. 탐욕과 시기의 양분만을 빨아올리던 뿌리를 잠시 감추고 이번 겨울은 삶의 귀근지시(歸根之時)삼아보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겨울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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