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요한계시록 15:2). ‘불이 섞인 유리바다’ 세상의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유리바다’란 유리로 된 바다라는 말이 아니라, 파도하나 없이 잔잔하고 맑은 상태를 의미한다.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비슷한 이미지다.

 
그런데 왜 최후의 심판을 불이 섞인 유리바다로 표현한 것일까? 바다는 성경에서 마귀의 활동장소를 상징할 때가 많다. 바다는 두려움과 혼돈의 장소였다. 성경에서는 바다에서 등장하는 무서운 존재를 용, 리워야단, 라합 등 다양한 이름으로 소개한다(에스겔 29:3, 시편 148:7, 이사야 27:1 등).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면 그때는 바다가 없어진다는 표현에서도 바다의 부정적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요한계시록 21:1). 바다가 잔잔해진다는 것은 마귀의 모든 활동이 진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불이 섞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거기 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타락한 세상과 함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럼 이런 큰 재앙에서 안전하게 피할 길은 있는가? 제일 처음 인용한 성경말씀에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의 곁에 있는 자들이 소개된다. 즉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다. 짐승이란 악한 마귀의 세력을 뜻하므로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끝까지 이겨내고 승리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치 옛 속담, “강 건너 불구경”과도 같다. 어느 건물에 큰 불이 났다고 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그 불에 죽을 만큼 대형화재였다. 그 불구덩이 속에 당신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화재현장 바깥 멀리서 그것을 보고 있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사람들은 감염병을 두려워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고, 외출도 삼가고,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죄의 심각한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노력을 하는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자연사를 하든, 질병에 걸려 죽든, 사고로 죽든 어떻게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다. 그 이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코로나는 우리의 육신을 공격할 수 있다. 병에 결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하실 수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는 영적 백신이요 치료제이다. 코로나에 감염되어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우리 영혼이 파멸에 이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으면 좋겠다. 최후의 심판이 강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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