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달력은 병정처럼 12월을 지키고 있다. 일에 맞는 옷을 입듯이 나는 주방 앞에서 저녁밥을 지을 때 앞치마를 입는다. 초록무늬 앞치마를 걸치면 자세가 있고, 요리하는 마법사가 된다. 그러다 청국장과 떡만두국을 끓여 알뜰하게 식탁에 놓을 줄도 알았다.

 
김과 파와 마늘을 냉장고에서 꺼내 수도꼭지에 물을 켠다. 요즘 들어 요리고 무엇이고 귀찮을 때가 많다.
생활전선에서 느닷없이 당하는 사고에 놀라고, 갱년기인줄도 모르고 울퉁불퉁 반응하고 겪으면서 황폐해진 겨울 같이 되었다. 내가 낳은 아이 둘은 스무 살이나 넘어 집을 떠나 멀리서 일하며 공부한다. 서먹서먹한 채 부부는 오랜 세월 한집에서 싸움에 지쳐 말없이 늙어간다.  
여신 헤스티아가 되어 집 안 화롯불에 불씨를 지키는 일,  추위와 설움을 견디며 오랫동안 나의 임무가 되었다. 
 
어릴 적에는 부뚜막에 늘 엄마가 계셨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지고 가마솥 뚜껑 여닫는 소리, 나무도마 위 칼날 소리와 굴뚝에 오르는 저녁연기를 맡으면 겨울은 내게 스르르 평온을 데려다 주었다.
 
지금은 동짓달이라 겨울 석달을 컴컴하게 지내야 한다. 초저녁도 밤이고 한참이나 자다 일어나도 깊은 밤 속이다. 차라리 일어나 앉아 ‘오두막 편지’를 읽는다. 법정 스님이 쓴 <새벽에 내리는 비>는 내가 아껴 읽는 수필이다.
 
다람쥐와 개구리, 벌레들이 더 어두운 굴에 들어 겨울잠에 든다. 계절의 급격한 변화는 겨울이다. 생물은 영하의 혹심한 기온을 견디려 긴장한다. 위태롭게 쉬거나 위태롭게 잠을 잔다. 사람은 추운 데에서도 빨리 걷기도 하고 때로는 도란도란 낭만을 즐길 줄을 안다. 벽난로와 흰 눈과 그 눈송이들을 따르는 시어들을 지어 언 가슴을 녹인다.
 
땅 위에 초목들은 된서리가 내리면서 창백하게 스러지고, 얼어붙은 땅속에서 뿌리만 겨우 고요히 숨을 지탱한다. 정지 한 듯 보이는 어두운 세상에서 인간만이 부산스럽다.  울고 웃고, 일하고 소리 지르고 미워하며 사랑한다. 아이 낳고 싸우고 부대끼며 먹고 마시는 일을 쉬지 않는다. 
 
오래전에도 그랬듯이 식탁과 계절이 서로 맞물리며 오고간다. 나의 식탁에는 딸기와 청국장과 미역국이 그때그때 놓일 것이다. 
 
오후 다섯 시면 석양이 내리고, 오늘 저녁 식탁은 조촐하다. 김장한 붉은 김치 한 접시와 김이 오르는 떡국이 겨울 가득 여백 위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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