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소리 한창이던 전나무 숲길 사이로 낙엽소리가 아삭 이며 늦은 가을을 배웅하고 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 마다 귀가 간지러운 듯 전나무 기둥들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힐책하는 양 바람소리를 빌어 꾸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요란할 때엔 느끼지 못했던 묘한 고요가 장막처럼 펼쳐진 숲을 스크린 속 주인공 같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보기도 하고, 모래사막을 걷듯이 조용조용 미끄러지며 걷기도하고, 가장 크고 실한 낙엽들만 골라 툭툭 앞발로 걷어차며 걸어 보기도 하다가 어깨를 넓혀 가슴을 펴고 깊은 숨을 몇 차례 들이 마시고는 잠깐 곧고 굵은 나무하나에 등을 대고 기대 서있다.
 
빽빽이 들어선 전나무 숲 사이로 골짜기를 흘러내리다 잠시 쉬어가는 계곡 물소리, 고개 넘어 소나무 옆을 지나 전나무 숲에 다다른 늦가을 바람 지껄이는 소리, 겨우살이 준비로 고목을 쪼아대고 있는 게으름뱅이 늙은 딱따구리 집 짖는 소리, 넌지시 넘겨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어깨 뒤로 스치는 초겨울 잠자리의 구애소리, 철을 잊은 개나리 눈 비비는 소리, 눈 소식에 놀라 남은 도토리를 수거중인 산 다람쥐 숨소리, 꼬리가 덜 익은 갈참나무 잎 용트림 소리, 그리고 전나무들의 제식훈련을 관장하는 조용한 구령소리가 낙엽 사이로 궁시렁  거리며 바람을 타고 들려오고 있다.
 
미처 듣지 못 한 자연의 숨소리를 남겨두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숲 사이를 비켜 걷는데 불연 사람소리가 낙엽소리와 섞여 정적을 흔드는가 싶어 지그시 눈을 감고 다시 멈춘다.

열기로 가득 찬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듯이 달려왔던 지난여름의 땀내와, 수확을 꿈꾸던 농부의 한숨 섞인 기지개 소리, 이러쿵저러쿵 소문만 무성하던 수상한 세월의 탄식 소리, 손을 높이 들어 목청을 높여 절규 하던 네거리의 군중들의 김빠지는 소리, 난장을 살려보자 분규 하던 장돌뱅이의 막걸리 타령소리들이 어수선하게 섞여 들린다. 환청이다!
 
듣지 말았어야 할 일그러진 환청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고요한 전나무 숲길에서도 들리는 이유를 계산한다.
 
아침햇살이 퍼지는 시간부터 저녁노을이 붉게 물 들 때까지 장 닭 우는소리 가끔씩 들리고, 송아지 울음소리 가냘프면 밭일 나갔던 어미 소의 짧은 답변으로 해가 기울고, 집집마다 굴뚝연기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던 어릴 적 고향마을을 애써 회상해 본다.
 
푹신한 초가지붕위에 벌렁 누운 박 덩이처럼 여유로운 저녁이 아쉽다. 노을위로 줄지어 나르던 철새들의 목적지가 궁금하던 철부지 시절이 그리운 지금 전나무 숲에 멈춰 서서 나만의 공식을 풀고 있다.
 
장구의 세월을 곧게만 올려보고 자라온 키다리 나무들이 유난히 많은 곳을 택해 그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고는 방금 빠져나간 실바람의 결을 따라 새 걸음을 연출 한다. 조금 전과는 현격히 다른 골바람이 나를 어루만진다. 목 위로 셔츠 깃을 쓱 올려 여미면서 저만치 먼저 가는 두 남녀의 발자국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낙엽을 세듯이 다시 걸어가고 있다.
 
오늘 유난히 향기로운 피톤치드가 가득한 영월 물무리골 생태습지 내 전나무 숲길사이로 나도 바람도 가랑잎처럼 가벼운 산책을 하고 있다. 마른 낙엽이 불러주는 부스럭 교향곡에 발맞추어 웃음소리 들리는 세상을 향해 다시 걸으며 오늘 저녁은 적당히 먹어도 배부르리란 포만감으로 삶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