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옹정(雍正)황제는 1678년에 태어나 1735년에 죽었는데, 아버지인 강희제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긴 황제를 했기 때문에 1722년에 황제가 되어 약 13년간 황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강희제의 4남으로 원래 황태자가 아니었고 어렸을 때에는 놀기를 좋아하고 참을성이 없어 자주 혼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성격을 고치고 매사가 신중해져 강희제는 죽기전에 유언으로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늦은 나이에 황제가 된 옹정은 당시 서북쪽의 정세가 안정이 되지 않자 군기처라고 하는 부서를 설치하여 군사조직을 강화하였다. 또한 관리들과 백성들을 감시하는 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황제권에 도전하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자신이 황위에 오른 그 다음해부터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강희제의 10번째 아들을 구금하여 제거 하였고 이어서 원래의 황태자가 죽자 그 다음해에는 8번째 아들을 제거 하였고, 자신의 형과 동생들을 거의 모두 죽여버렸다. 
 
이렇게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친인척들을 제거 한 후, 그 다음의 화살은 조정의 신하들을 겨누었다. 그는 당시의 관리들이 부패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반부패 운동을 벌여 오랜 관료들을 숙청했다. 동시에 당파를 만드는 것을 극히 혐오하였는데 당파와 파벌로 인해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거나 올바른 정책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행위들에 가차없이 죄를 물었다.  
 
옹정은 권력을 위해 혈육을 죽이고 또한 관리들을 부패의 이름으로 숙청함으로서 완전한 황제 독재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도 권력투쟁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여 후계자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후계자를 알려주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일단 후계자를 정한 두 개의 조서를 만들어 놓았다. 한 부는 북경의 자금성안에 있는 건청궁에 가면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그 뒤에 감춰두었고 한 부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서는 황제가 죽은 후에 밀봉을 열어 확인 한 후 그 내용에 따라 새로운 황제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가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 황태자들간의 골육상쟁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내부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확보한 옹정은 당시 서쪽의 티베트와 청하이성, 사천성 등에서 여전히 청나라에 순종하지 않는 민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특히 티베트는 강희제 시기에 팔기군을 보내 원정을 하였으나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옹정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장군에게 23만명의 군대를 보내 이들을 정복하도록 하였고 티베트는 지금의 청장고원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북몽골쪽의 준가르군의 반란에 군대를 보내 이들을 쫓아내고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그의 아들인 건륭에 이르러 몽골 제국 이후 최대의 영토를 가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옹정제가 강희제와 건륭제와 더불어 청나라의 가장 발전한 시기라고 불리는 이유는 옹정이 국내정치와 경제를 특히 잘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일을 하였는데 모든 지방의 보고서를 자세히 읽고 이에 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특히 그는 강희제의 정책을 잘 이어받아 세금을 단일화하였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재정개혁을 단행하여 강희제 말기에 국고가 700만냥에 불과하였으나 그의 말년에는 6천만냥으로 재정을 확보하였다. 
 
청나라의 번영기를 이끌었던 그도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청나라의 기록은 그가 과로로 병사했다고 적고 있으나 또 한 소문은 그가 죽인 산동성의 학자의 손녀가 몰래 침입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는 설도 내려져 오고 있다. 
 
옹정에게는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자신도 암살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지금껏 내려오고 있는데, 권력의 맛은 달지만 잠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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