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조금이었어/ 아주 조금이었지/ 그래도 그게 빛이었거든” (임명태의 소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 중에서).

 
갖은 실패를 딛고 고생 고생하다가 자그맣게 새로 시작해 보려는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어(詩語)다. 아주 조금의 빛이라도 그게 빛이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 빛이 얼마나 어둠을 뚫고 더 환하게 비취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빛이기에 그것 자체로 이미 아름답다. 그 빛은 삶의 희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조명가게엔 세상을 빛나게 할 수많은 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값싼 제품부터 값비싼 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시골 헛간 어딘 가에라도 가서 빛을 비춰야 그 전구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아무리 비싼 전구라도 그냥 조명가게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한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춰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두워진 마음에 한줄기 빛이라도 비춰주면서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한번 주신 인생인데 각자에게 주어진 빛의 색깔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얼마나 찬란한 빛이었든 간에 말이다. 
 
마지막 숨 거둘 때 누구에겐가, “당신은 내 삶에 희망의 빛을 선사해주었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런 빛이 조금씩 많아지게 될 때 가정을 넘어 사회에도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희망도 전염성이 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심겨진 자리에서 작은 빛을 발하며 산다고 한들 사회가 변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나 하나 꽃피워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게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하의 시, ‘나 하나 꽃피워’).
 
우리 서로가 빛나는 인생이 되어보자. 내가 돋보이는 인생을 살자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빛을 비춰주는 등대같은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에게, 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조금이나마 밝게 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는 지금 팍팍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위로가 필요하고 희망이 필요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아니 그것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작은 볕들이 되기를 바란다. 
 
성경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 했다. 믿는 이들이 먼저 진리의 빛으로 살아갈 때 그 빛을 통해 많은 이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올 것이다. 진정한 빛은 어둠에 감추어질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태복음 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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