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시기,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7년간의 전란을 겪었으며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조선은 선조 이후 광해군이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이 또한 순탄치 않았다. 

 
조선이 섬기던 명나라에 강력한 적대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신의주에서 중국의 명나라가 만들어놓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까지는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유목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명나라에 의해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잃은 여진족의 수령이었던 누르하치는 자신의 세력을 키워 여진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는 징기스칸과 같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한족들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지금 중국의 랴오닝성 일대의 70개의 명나라의 성을 함락시키고 심양을 수도로 삼았다. 
 
이에 놀란 명나라는 조선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군사 1만명을 명나라에 파병했고 광해군이 적당한 때 후금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광해군이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의 안전을 담보했다는 학설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실제로 보낸 1만명 중 8천명이 사망하여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또 다른 학설도 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명나라와 여진족의 후금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는 동안 조선에서는 또 다른 정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히는 인조 반정이 일어났다. 왕위에 오른 인조와 관료들은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를 거부하고 ‘친명반청’의 외교노선을 고수했다. 
 
당시 조선의 왕들은 선조도 물론이지만 인조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관료들은 사익에 눈이 멀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니편과 내편이냐’만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국내정책은 물론이고 대외정책도 막장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후금은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으며 1636년 드디어 누르하치의 아들인 황타이지가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 즉 청나라로 바꿨다. 그리고 자신의 후방 쪽에 있던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이를 수용하고 자신을 따르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인조와 관리들은 사신을 푸대접하고 조선은 명나라를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였다. 당시 조선은 황제라는 단어를 청나라가 사용한다는 것은 불충이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스스로 사대주의 외교를 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청나라의 황타이지는 인조에게 서신을 보내 조선이 청의 말을 듣고 왕자를 인질로 보내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경고에도 조정에서는 청나라와 전쟁을 해야한다는 주전파가 힘을 얻고 있었다. 당시 최명길과 몇 명의 화해를 주장하던 신하들은 파직을 당했고 힘없고 약한 조선의 백성들은 또 한번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1636년 겨울 드디어 청나라는 12만명의 대군을 파병하여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를 야만족이고 애송이라고 비웃던 인조와 관료들은 백성들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몇년전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는데 바로 청나라의 침략을 그린 병자호란이 그 배경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지휘관인 용골대는 한족, 몽골, 만주족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큰 길을 따라 거침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단지 나흘만에 개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함락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전국에 있던 군대가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으나 모두 청나라군에 의해 궤멸되고 말아 남한산성은 고립되었다. 
 
포위된지 45일만에 혹독한 추위와 식량이 떨어져 남한산성안의 무능한 왕과 관리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무릇 60만명이 넘었으며 그들은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중국인에게 노예로 팔려갔다. 무능한 왕과 부패한 관리들이 또 한번 백성들에게 비극을 안겨준 역사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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