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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의 지혜 408다시보는 중국 역사 (63) 임진왜란의 발발
박기철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p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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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6  11: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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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무능한 선조와 부패한 관리들은 자기들만 살기에 급급해 백성들을 버리고 신의주까지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처해서 사대를 청했던 조선이기에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에서 고구려를 시작으로 고려에 이르기까지 형식적으로는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독립적이었고 자주적인 외교를 취하고 있었다. 고구려 시기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고 거란의 침략도 패퇴시킨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을 중화(中華)라고 칭송하면서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임하여 다른 나라들을 내려다 보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백척간두에 선 조선 조정의 원군 지원 요청에 명나라는 쉽게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명나라 자체가 국력이 점차 약해지는 상황이었고 서북쪽의 몽골족의 반란을 막기에 급급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명나라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 지금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석성은 국제정세를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석성은 북쪽의 몽골이나 유목민들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2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는 일본을 막아내지 못하면 남북으로 포위되는 형국을 맞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석성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 정부는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명나라는 당시 요동지역을 지키던 조승훈 부대 4천명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조승훈의 요동 지역의 군대는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름대로 전투의 경험이 있어 일본군을 얕보았다가 일본의 공성계에 걸려 부대의 70%가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석성은 당시 심유경을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과 협상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이 이야기한 명나라에 대한 공격의 의도를 왜곡하여 보고하였다.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도 거짓으로 평화를 청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이후 이 사건은 명나라 황제를 기만하였다 하여 석성이 탄핵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명나라는 이여송을 다시 조선에 대한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여송의 군대는 전차 360문과 화포 72,000개로 중무장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약 4만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온 이여송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기세로 한양을 수복하려고 무리한 진군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고양인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함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여송의 패배로 임진왜란은 장기화되어 한반도는 7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무능한 선조는 이여송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살아있는 이여송을 기리는 사당인 무열사를 지어 바쳤다. 
 
명나라의 군대가 임진왜란에 기여한 공이 작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와중에도 조선의 장군들과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여 대첩을 거두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삼대대첩이라고 하는데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을 가리킨다. 
 
이순신은 일찌감치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철저한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한번도 해전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옥포해전과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을 통해 일본군의 보급을 끊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일본군이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권율은 이여송의 벽제관 전투에서 기세가 오른 일본군을 행주산성에서 막아냈는데 9차례나 공격하였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주대첩은 일본군이 양식을 얻기 위해 호남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던 진주성에서 김시민이 3,800명의 군인과 2만명의 백성을 가지고 일본군을 막아낸 전투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쇠약해가던 국력이 더욱 빠르게 소진된 것은 사실이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더 큰 이유는 여진족의 발흥과 농민의 반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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