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싸움과 권력투쟁에 몰두했던 무능한 임금을 가진 조선은 결국 일본의 침략을 허락하고 말았다. 특히 권문세가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농장을 확대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고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끝이 없었다. 

 
한편 일본은 그동안의 전란을 종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그 세력을 해외로 팽창하고자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585년에 이미 대륙 진출을 이야기 했고 대마도 군주에게 조선 공격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 1587년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미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수년전부터 전쟁 준비를 해왔음을 알 수 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격적으로 그 마각을 드러내어 대마도 군주로 하여금 조선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정명가도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게 길을 내어 달라는 의미이다.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명분이었을 뿐 실제로는 조선에 대한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도요토미가 조선을 공격한 진짜 이유는 일본을 통일하면서 자신에게 적대시했던 지방의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전쟁을 통해 소모시켜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1592년 5월 23일 도요토미는 약 20만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날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준비가 된 일본과 준비가 안된 조선의 전쟁의 결과는 참담했다. 
 
기세를 올린 일본은 겨우 열흘만인 6월 3일 상주에서 이일을 대파했고  경상도가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시 나흘 뒤에는 신립 장군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신립의 패배는 조선의 국운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일본군은 3군으로 나누어 수도인 한양을 공격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이끌던 제1군은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지나 충주로 이동하였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가 이끌던 제2군은 울산과 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1군과 합쳐서 한양으로 진군했다. 또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놀란 조선의 조정에서는 임금과 관리들이 자신들만 살 궁리에 빠져 백성들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능한 선조와 부패한 관리들은 개성을 지나 평양쪽으로 도주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지배자로서 백성들에게 군림하던 세력들이 막상 위기가 닥치자 제일 먼저 도망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던 선조와 그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면서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여러 채의 배를 침몰시켜 백성들의 피난길도 막아버렸다. 도성의 백성들은 배신감과 분노에 궁궐에 불을 지르고 노비들은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당시 내전을 겪었던 일본군의 입장에서 도성이 함락되거나 패하게 되면 성주는 할복을 하고 주민들은 항복을 하여 전쟁이 끝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조선에서 임금이 도망을 간 것에 대해 황당해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말 놀랐던 것은 임금이나 관리들이 아니라 백성들의 태도였다. 
 
일본의 경우 당연히 백성들이 항복을 하여야 하는데 조선에서는 왕이 백성들을 버렸는데도 백성들은 항복하지 않고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원래 일본군의 계획은 조선에 들어와 필요한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하려고 하였는데 백성들의 저항과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에 그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유격전을 펼치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그 대표적인 의병으로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였고,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또한 호남에서 김천일은 일본군을 막아내고 자신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보여준 의병들의 모습은 한반도의 주인이 몇 명의 지배자가 아니라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민초가 그 주인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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