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변화되는 격동의 시기에 한반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는 한족에 대한 탄압과 식민정치로 반란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주원장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그 원나라 말엽, 한반도에서도 몽골족에 적대적이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왕인 공민왕은 원나라에 반대하는 자주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씨 일파를 제거하고 몽골의 연호를 폐지하였다. 공민왕은 또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의 몽골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어지러워진 중국에서는 몽골에게 대항하던 홍건적이 20만명의 병력으로 고려를 공격하였으나 이들을 격퇴하였고 동시에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지속적으로 고려를 괴롭혔기 때문에 고려의 국력이 점차 쇠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민왕은 말년에 신돈이라는 인물을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신하들에게 피살당하고 말았다. 
 
공민왕 사후 고려는 우왕과 최영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성계도 포섭되어 같은 노선을 걷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철령이 원래 원나라 영토였으니 고려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동지역이 고구려의 땅이라고 생각한 고려는 그 요구를 바로 거부했고 오히려 요동정벌을 결정하였다. 
 
이때 최영이 팔도 도통사를 맡고 이성계는 우군 도통사를 맡았다.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위화도까지 갔으나 4가지 이유로 명나라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일명 사불가론이라고 하는데 첫째는 작은 나라가 큰 국가를 공격할 수 없다.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는 전군을 동원하여 명나라와 대치하면 왜적이 틈을 타서 공격할 수 있다. 넷째는 장마철이므로 진군하기 힘들다. 
 
이상의 명분을 들어 이성계는 자신의 군대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명나라가 아닌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이성계의 반란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최영은 이성계에게 잡혀 귀양을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끌려와 처형을 당했고 공민왕의 뒤를 이었던 우왕도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계획적으로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짧은 거리임에도 19일이나 걸렸으며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14일이나 체류하였다. 반면 이성계가 고려를 공격할 때는 10일도 걸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계획적인 회군이었음을 반증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첫째는 고려 내부의 권력 질서를 변화시켰다. 당시 이성계를 중심으로 떠오르던 무인세력과 정도전 등의 조선을 건국했던 사대부 세력이 결탁하여 고려의 귀족들을 몰아내게 되었다. 여기서 최영은 순수한 무인으로서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나라를 생각했기 때문에 비록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둘째는 한반도의 왕조가 중원의 왕조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독립을 유지하고 심지어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 가차없이 징벌을 가하려고 하던 자주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민왕때부터 명나라와 관계를 맺어 왔으나 명나라가 많은 세공을 요구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막기도 하였다. 이에 고려는 오히려 원나라가 있던 요동지역에 세 번이나 출병하여 영토를 확보하고 통치 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단 한차례도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거나 또는 수복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성계는 결국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1392년 공양왕으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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