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는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1368년에서 청나라에게 멸망한 1644년간 약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당시의 경제력은 한나라와 당나라와 같이 세계에서 최고로 발전한 국가였다.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과 한족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이어져 왔는데, 명나라는 몽골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긴 호흡으로 보면 실제 한족이 중원을 완전히 통치한 기간이 사실 그렇게 길지않다. 다만 지금의 중국이 모든 이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안에 녹여놓았을 뿐이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남경을 수도로 삼았고 71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이 요절을 했기 때문에 손자에게 권력을 계승하였다. 이후 친척들의 발호에 겁을 먹은 건문제는 주원장의 장례에 오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사촌들과 왕족들중 중심이 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훗날 영락제)는 반란을 일으켜 남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중국 왕실의 전통적인 친족간의 피의 전투가 또 되풀이 되었다. 1402년 결국 영락제는 남경을 함락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영락제는 원래 몽골족의 재침입을 두려워하여 북경쪽의 국경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고 연왕(燕王)에 봉해져 있었다. 그래서 북경을 이전에는 연경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지명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맥주가 연경 맥주이다. 청도의 청도맥주와 동북지역의 하얼빈 맥주 또는 설화 맥주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맥주이며, 북경사람들은 연경 맥주를 즐겨 마신다.
 
영락제는 결국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하였고 이를 통해 남쪽과 북쪽을 완전하게 통치하는 한족의 국가로서 명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전의 송나라는 금나라에 쫓겨나 주로 남쪽 지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명나라의 영락제에 와서 중국의 동서남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영락제는 초기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당시 환관이던 정화를 시켜 대함대를 구성하여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파견하였다. 영락제의 이러한 바다를 통한 진출은 중국 역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티베트와 네팔에도 사절을 보내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심지어 중앙아시아에까지 그 영향력을 펼쳤다. 일본에도 명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요구하였는데 처음에는 이에 따른 조공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중국의 말을 듣지 않고 종주권과 조공을 거부하였다. 
 
또한 서쪽으로는 고비사막까지 원정을 하였고 스스로도 다섯차례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여 티베트와 필리핀 등에서도 조공을 받았다. 북쪽으로는 만주의 여진족을 복속시켰고 남쪽에는 베트남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베트남의 경우는 진씨 왕조의 후계자를 몰아내고 찬왕조가 세워졌는데, 이때 진씨 왕조의 잔당들이 명나라에 지원을 요구하였고 명나라는 군대를 보내 베트남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일개 지역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유격전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저항하였고 오히려 명나라 군대가 패배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되었다. 베트남 역사에서는 명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영락제 말년에는 정부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흉년이 이어지면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새아라는 여인이 중심이 되어 백련교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가 이끄는  반란군은 남경과 강소성,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동안 기세를 올렸다. 결국 반란의 진압에는 성공하였으나 명나라는 초기부터 내상을 입고 있었으며 영락제 또한 몽골 원정에서 병을 얻어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영락제가 재위하고 있던 동안 중국은 해외원정을 통해 바다를 중시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실시하여 해외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렇게 해외와의 차단은 결국 중국을 스스로 만리장성 안에 가두게 되고 세계에서 조금씩 뒤처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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