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말기 세상은 더욱 뒤숭숭해졌다. 원나라 황실은 내부에서 권력 투쟁으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몽골족 통치에 신음하던 한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코로나로 세계가 고통받고 있듯이 당시 유럽과 중국도 페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통계를 보면 전 세계 인구의 20%가 사망했다고 하니 가히 공포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가난과 굶주림을 마치 숙명처럼 느끼고 있었다. 전염병은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빼앗아 갔고 더 이상 의지할데가 없던 그는 결국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갔으나 절도 형편이 여의치 않자 탁발승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탁발승은 집집마다 목탁을 치면서 밥을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냥 걸인으로 봐도 무방하다. 주원장은 어렸을 때의 이 고통이 훗날 황제가 되어서도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피의 황제가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당시 원나라에 저항하는 많은 세력들 중에 백련교를 중심으로 하는 홍건적의 반란이 가장 활발하였다. 이 홍건적들은 원나라에 뿐만 아니라 고려도 침략한 적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로 침략하였으나 20만명의 홍건적이 고려군의 활약으로 10만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다시 도망갔다. 
 
홍건적은 주로 안휘성과 하북성 등 원나라 세력이 약한 곳에서 반란을 시작하였고 점차 그 세력을 불려갔다. 특히 안휘성의 곽자흥이 이끄는 세력이 강했는데 주원장은 일반 병사로 들어가 적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우면서 곽자흥 세력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갔다. 이때 곽자흥의 눈에 들어 그의 양딸과 결혼을 하고 사위가 됨으로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끊임없이 원나라에 대항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는 와중에 지도자였던 곽자흥이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곽천서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곽천서는 원나라군이 남경을 공격하였을때 포로로 잡혀 살해당했다. 이제 곽자흥 부자가 죽고 나자 그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주원장의 차지가 되었다. 
 
반란군의 지도자가 된 주원장은 다른 반란 세력들이 원나라와 싸워 서로 힘이 빠지게 하는 한편 자신은 스스로의 세력을 키워갔다. 마치 훗날 국민당의 장개석이 일본군과 싸우면서 전력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모택동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던 것과 대조할 만하다. 
 
주원장은 이렇게 자신의 힘을 키운 후 당시 반란군 중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진우량과 일전을 벌였다. 진우량은 당시 강남 지역 최고의 반란군 지도자로 스스로 남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한나라라고 칭하고 황제가 되었다. 
 
주원장은 이간계를 사용하여 진우량을 끌어내어 매복을 하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후 진우량은 자신의 남은 병력 60만명을 동원하여 주원장과 대결을 벌였는데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분열되어 있던 반란군을 다 통일한 주원장은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의 수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자신의 상대인 원나라를 향해 진격했다. 같은 해 여름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 즉 지금의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의 곳곳에 남아있던 원나라 세력을 다 제거한 것은 명나라를 수립한 이후 14년이 지난 1382년의 일이다. 이후 명나라는 북쪽의 유목민들의 침입을 다시는 받지 않기 위해 만리장성을 증축하고 공고히 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북경에 가서 보는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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