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의 몽골이 파죽지세로 중앙아시아와 심지어는 유럽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동쪽에 있는 고려도 수십년동안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던 고려도 몽골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어 평화를 획득했다. 다른 유목국가처럼 만약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난 후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5대 칸이었던 쿠빌라이 칸이 자신의 국가 이름을 원(元)이라 하면서 중국은 송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가 되었다. 송나라는 이미 거란과 금나라에 많이 시달렸으며 결국 중국 전체가 원나라, 즉 몽골족이 통치하는 국가가 되었다. 
 
몽골족은 한족을 상당히 멸시했고 노예로 취급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에서 원나라를 자신들의 역사로 한다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을 몽골족의 식민지로 볼 수 도 있다. 원나라가 중국을 완전하게 지배한 것은 1271년에서 1368년까지로 약 100년의 시간이었다. 
 
몽골족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이후에도 그 주변의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도 침략을 감행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고려와 연합하여 공격하였는데 태풍을 만나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고, 베트남의 경우에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항복만 받는 형태로 그 침략을 멈추었다. 
 
몽골족은 비록 군사력으로 중국을 식민지화 하였으나 워낙 수가 전체 중국 인구에 비해 소수였기 때문에 엄격한 계급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통치를 유지하고자 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100만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과 같은 서쪽의 유목민족인 색목인들을 이용하여 수천만명의 한족들을 통치했다. 
 
또한 고려 역시 부마국이었기 때문에 제3계급으로 고려인들을 우대하여 중국의 통치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어떤 이는 원나라의 병부상서까지 올랐고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의 관리가 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한국의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었던 기황후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기(奇)황후는 원래 고려 출신이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해마다 고려에게 자신들에게 바치는 조공으로 여자를 요구했는데 이를 공녀라고 하였다. 기황후도 이렇게 끌려간 고려의 여인 중의 한명이었다. 기황후가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 또 다른 고려 출신의 환관인 고용보를 만나게 된다. 
 
환관 고용보는 기황후를 궁녀로 만들어 당시 혜종에게 보냈는데, 혜종은 기황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그녀를 후비로 맞이했고 총애하기 시작했다. 결국 많은 곡절을 겪은 후 황태자를 낳았고 자신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후에도 끊임없는 반대파의 도전을 물리치고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니 고려가 황제의 외가가 되었다. 이후 더 많은 고려 출신의 사람들이 원나라에서 지배계급으로 올라 설 수 있었다. 
몽골제국은 단순히 원나라를 세우는데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역까지 넓은 영토를 지배하여 팍스 몽골리카를 탄생시켰다. 이때 넓은 지역간의 왕래와 연락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바로 역참제도였다. 역참은 일정한 구간마다 역을 두어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는데 원나라 안에만 1,400개의 역참이 있었다. 몽골제국의 완성과 유지에 있어서 역참은 필수적인 제도였다. 
 
이를 통해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였고 이를 통해 서양과 동양이 무역뿐만 아니라 문명의 교류가 본격화 될 수 있었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도 이 역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몽골이 인류 역사상 중요한 이유는 바로 문명의 교류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한편, 원나라는 군사력에만 의존해서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통치력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원나라 치하에서 고통을 받던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원나라를 통치하던 몽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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