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버지들은 일반적으로 자녀들에게 사랑 표현을 하는 일에 익숙하다.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표현해준다.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을 이제는 당연한 의무로까지 생각한다. ‘민주적인 아버지’, ‘대화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오늘 현대의 아버지상이다. 

 
하지만 우리 앞 세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사랑표현에 서툴렀다. 당장 자식들을 건사하고 먹여 살리는 일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필자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아버지로부터 직접 ‘사랑한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시대 아버지들은 으레 그랬을 것이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청과도매상을 하셨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운전기사 아저씨와 함께 대전의 큰 청과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 오는 길에 동행했다. 그런데 물건을 잔뜩 싣고 다시 전주로 돌아오다 큰 교통사고가 났다. 전방주시 태만이었다. 정지신호 앞에 멈춰선 대형 8톤 트럭을 뒤에서 추돌하여 우리 차는 폐차가 되었고, 거기에 실렸던 과일들도 다 못쓰게 되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는 급히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의 병원으로 오셨다. 차는 파손되고, 실었던 과일들은 다 못쓰게 되어 얼마 기간 동안은 아예 장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사 아저씨가 전망주시를 제대로 못한 채 간식거리에 눈이 팔려 이 사고가 났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버지 뵐 면목이 없었다. 기사가 딴 짓을 하면 옆에서 봐주어야지, 뭐 하느라고 신호등이 정지신호로 바뀐 것도 보지 못했느냐고 꾸짖는다면 나는 뭐라고 해야지? 
 
그런데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로 나에게 물으신 것은 “어디 다친 데는 없니?”였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보셨을 법한데, 그저 “다친 데는 없니”라는 말 한마디였다. 이후 다른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그때 필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껴진 것은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트럭은 폐차되고 당시 다른 차가 없었으므로 아버지와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내려와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창가 쪽에 자리 잡게 한 후에 안전벨트를 손수 채워주셨다. 지금이야 안전벨트가 일상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안전벨트를 매야한다는 의식 자체가 별로 없었을 때였다. 
 
그동안 한 번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런데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을 뻔 했던 그때 그 무엇보다 아들의 안전을 염려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당연히 재산상 손해보다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적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필자는 자녀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간 아들은 이제 그렇게 안하지만, 아직 중학생인 아들은 자주 안아준다. 또한 사랑의 표현에는 서툴렀던 나의 아버지에게도 가끔 가 뵙고 돌아올 때면 안아드린다.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말없이 전해진 묵직한 사랑도 사랑이었다.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잠언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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