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한족의 역사라기 보다는 만리장성 이북에서 중원으로 쳐들어온 유목민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이들은 번번히 중원을 침략하였고 한족들을 아래에 두고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문약했던 송나라를 유린하였으며, 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초기에 송나라와 결탁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숨돌릴 틈도 없이 여진족의 금나라는 연운십육주 지역을 약탈하고 많은 한족들을 북쪽으로 끌고 갔다. 더욱이 송나라가 금나라의 횡포에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발각되자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끌고 갔다. 이를 우리는 북송의 멸망이라고 하며, 이후 황제의 동생이 남쪽으로 도망가 다시 나라를 세웠으니 남송이라고 한다. 
 
금나라는 남송도 가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했는데 중국의 남쪽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강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중국의 가장 유명한 충신으로 알려진 악비(岳飛)가 금의 공격을 막아내어 남송과 금나라는 장기간의 대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금나라는 자신들의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많은 여진족들을 이주시켜 한족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또한 원래 한반도의 북쪽에 거주했던 여진족들은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 고려와도 갈등을 빚었다. 특히 거란의 요나라가 멸망한 후 고려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물론 이에 대한 당시 고려 내부의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실용주의 노선을 선택하여 금나라와 형식적인 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는 대외관계에서 상당히 실용주의적이고 국익에 부합하는 유연한 정책을 펼 줄 알았다. 
 
한편, 북쪽의 또 다른 유목민족으로 몽골족이 조금씩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몽골족들은 지금의 몽골초원 지역에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징기스칸이다. 징기스칸은 우선 몽골초원에 있던 몽골족들을 통합하여 실력을 키웠고, 자신들의 부족의 숙적이었던 타타르족을 공격하여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몽골족들에게 징기스칸은 ‘칸’이라는 즉, 왕의 칭호를 받았다. 
 
징기스칸은 자신의 국가인 몽골국을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군대를 보강하고 강력한 훈련으로 세계 최고의 전사들을 양성하였다. 징기스칸은 몽골의 조랑말을 이용하여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한국의 제주도에 있는 말들이 대부분 몽골말들이다. 몽골말은 서양의 말에 비해 키도 작고 뚱뚱하지만 지구력이 강해 오랜 시간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군대의 조직을 기병에만 그치지 않고 도시들을 함락시키기 위해 투석기와 쇠뇌, 사다리 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몽골군들은 뛰어난 징기스칸의 지도하에 드디어 정복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중국의 서북쪽에 있던 서하(西夏)를 공격했다. 서하는 처음에는 징기스칸에게 복종하였으나 훗날 반란을 일으키자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역사속에서 서하를 사라지게 하였다. 
 
징기스칸은 이제 중원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증조부를 죽였던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징기스칸의 금나라에 대한 공격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의 후계자에 이르러서야 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징기스칸이 당시 금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을 봉쇄하고 공격하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일단 철수하였다. 그러나 금나라가 몽골족의 공격을 피해 개봉으로 천도하자 징기스칸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방화와 약탈을 하였다. 
 
결국 1234년 징기스칸의 아들인 우구데이가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중원에 대한 공략을 지속하였다. 징기스칸은 주변국가를 침략하면서 만약 항복할 경우에는 자치를 허락하고 멸망시키지 않았으나 반항할 경우에는 무자비한 보복을 펼쳐 풀한포기도 남지 않을만큼 처절하게 멸망시켰다. 몽골족의 공격으로 중국의 변방에 있던 많은 나라들이 역사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들의 공격은 서쪽의 유목국가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중원으로 그 공격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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