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에서 가까운 안성시 양성면에 가면 조병화문학관이 있다. 여러 번 그곳을 지나치면서 한번은 가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까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조병화 시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손꼽으라면 단연코 ‘공존의 이유’가 될 것이다.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이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1960년대의 작품임에도 여전히 시를 읽는 맛이 있다. 이 시를 처음 접했던 청소년, 그리고 대학생 시절, 문학적으로 멋스런 표현들에 심취했던 그 때의 정서에도 잘 맞았다. 
 
그러면서 가끔씩은 이 시를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나와 너, 나와 우리의 인간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조병화시인의 ‘공존의 이유’에 나온 시어들은 ‘반어적’(反語的)이다. 관계에서의 실망의 경험일 수도 있고, 내 입장에서의 관계에 대한 집착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에서 오히려 깊이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목마름이 느껴진다. 비대면(언택트)의 시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각종 메신저와 유튜브를 통한 간접적인 관계들이 낯설지 않은 이 시대에, 왠지 다시 한번 공존의 이유의 시어들은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누구를 만나서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친근하게 담소를 나눈다는 것이 어딘가 부담스럽기까지 한 괴이한 시대이다. 해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이던 가족수련회를 포함하여 그간 진행해 오던 각종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되어버렸다.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그러려고 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 우리로 그렇게 가벼운 인간관계로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다고 한다. 한 주는 학교에 가고, 한 주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면서 격주로 가는 학교이다. 그런데 학교에 가서도 아이들과 놀 수가 없단다.
 
학창시절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는 물론 공부도 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위해서이다. 코로나사태로 개학이 연기되어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자, 평소 학교가기 싫다는 아이 입에서 학교가고 싶다는 말이 나온 것도 공부가 아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교에 가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가까이 접촉하는 일체의 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럴려면 왜 학교에 가는지 모르겠다는 아들의 푸념이 이해가 간다. 
 
아무리 비대면의 문화가 발달하고, 더구나 지금과 같이 감염병의 위기를 만나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는 관계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공존의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하루빨리 이 감염병의 사태가 진정되고 서로 만나서 마음껏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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