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을 넘어 북쪽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의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갈족과 만주족, 그리고 여진족은 거의 같은 민족이었다. 

 
흉노족과 돌궐족은 현재 중국의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이후에도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였다. 반면 기타 민족들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갈족은 원래 중국의 진시황 이전인 춘추전국 시대에도 등장하는 유목민으로 그 이름은 숙신이었다. 이들에 대한 호칭은 수나라와 당나라때는 말갈이라고 불렀다. 이후 말갈족의 일부는 여진족이 되었고 다시 만주족으로 그 이름이 이어져 내려왔다. 현재도 만주족은 중국의 랴오닝성의 동쪽, 압록강과 가까운 본계(本溪)라는 곳에 거주하면 만주족 자치지역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면 단군조선이 멸망한 이후 부여가 만들어졌고 부여는 지금의 중국의 동북3성, 즉 랴오닝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지배하였다. 부여는 몇 개 국가의 연맹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그리고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가 있었다. 부여는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그 당시 많은 유목민들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고 있었다. 말갈족의 전신인 숙신도 부여에 속해있었다. 
 
세 개의 부여중에서 주몽이 세운 졸본 부여가 다른 부여들을 통합하고 한나라때 세운 한사군(漢四郡)을 공격하여 중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이후 이 지역의 거란과 말갈의 일부 부족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통치를 받던 말갈족들은 원래 기마술이 뛰어나고 전투에 능했기 때문에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이들을 막아내는데 고구려 아래에서 큰 공을 세웠다. 비록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미 고구려에 동화되었던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하자 다시 뿔뿔이 흩어져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을 영주란 곳으로 끌고 갔는데 그 곳에는  말갈족, 거란족 등 다수의 소수민족이 함께 있었다. 이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일부와 힘을 합쳐 당나라군을 쫓아내고 발해국을 세웠다. 
 
그러므로 발해는 사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이원화된 국가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유민은 지배층으로 그리고 말갈족은 피지배층의 관계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말갈족의 일부인 흑수말갈은 흑룡강성쪽에 있으면서 발해에 대항하였다. 발해의 유민과 일부 말갈족들은 고려에 투항하여 고려인이 되었고, 흑수말갈은 거란에게 복속하여 그 이름을 여진(女眞)이라고 불렀다. 
 
고려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여진족들은 고려에게 대항하지 못했고, 고려도 이들에게 무역을 허가하고 고려인으로 귀화한 여진족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어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여진인들은 고려에 말과 모피 등을 조공으로 바치고 대신 식량과 농기구등을 받아가 생활하였다. 
 
당시 요나라에 속해있던 여진족의 한 우두머리였던 아골타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점차 세력을 키워 다른 여진족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요나라가 여진족들에 대해 탄압을 심하게 하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에 성공한 아골타는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고 이에 대해 요나라는 70만의 대군을 일으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오히려 금나라는 송나라와 내통하여 연합군을 만들어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중국의 북동쪽에서 유목민들로 생활하며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거란족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중국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금나라는 이후 중국의 중원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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