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중원에서 내란이 발생하거나 분열이 일어나 한족의 세력이 약화되면 그 주위의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곤 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부족들은 한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흉노족이 그랬고,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이 모두 한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족을 공격해 한족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곤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을 거치는 등 한족이 어려워지자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거란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토네이도처럼 중국의 북쪽을 휩쓸기 시작했다. 
 
거란(契丹)족은 원래 몽골 동부 지역에서 발원한 몽골과 퉁구스의 혼혈 계통의 부족이었다. 그들은 내몽골, 중앙아시아, 랴오닝성, 헤이롱장성, 지린성 등 중국의 동북3성과 연해주와 한반도의 함경북도 지역에 넓게 분포해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거란은 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통합된 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은 돌궐의 통치도 받았고 또한 위구르의 통치도 받아 자신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북쪽을 침범하기도 하였으나 강력한 광개토대왕은 이들을 토벌하여 일부는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거란족은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자신들의 부족을 통합하여 실력을 키웠다.
 
위구르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쇠퇴하자 거란은 주변의 다른 유목민들을 흡수하여 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후 부족장이었던 야율아보기는 팽창정책을 시도하여 많은 한족들을 포로로 잡아와 노예로 삼았고 이들을 통해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가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16년에 몽골의 츠펑이란 곳에 도읍을 정해 상경임황부라고 하였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했다. 이후 924년에는 서역을 공격하여 탕구트와 토욕혼을 굴복시켰고 그 다음해에는 발해를 공격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해동성국이란 이름으로 당나라도 감히 넘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거란이 공격할 때에는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의 남은 세력들은 일부는 고려에 귀순하였고 일부는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발해를 멸망시킨 후 요나라는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거칠게 밀려오는 거란족에게 문약했던 송나라는 요나라와 굴종적인 평화조약인 ‘전연의 맹’을 맺게 된다. 그 조건은 송나라가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보내고 형제 국가의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즉 요나라가 형이 되고 송나라는 동생이 된다고 하는 조약으로 중화주의에 빠져있던 한족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요나라는 송나라가 매년 보내주는 조공으로 물자가 풍부해지자 이를 기반으로 영토 확장을 지속했다. 동쪽에는 고려가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송나라와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진출했다. 동쪽으로는 요동에서 동해까지, 서쪽으로는 천산의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요나라의 통치 방식은 거란족과 한족을 구분하였다. 거란족과 유목민들에게는 유목민의 방식으로 통치했고 한족 지역에는 한족방식으로 다스렸다. 또한 복장도 황제와 한족 관리들은 중국식으로 그리고 거란족은 거란식 복장을 입도록 하는 이원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훗날 원나라와 청나라에게도 전해져 유지되었다. 
 
요나라 말기 또 다른 유목부족이었던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세웠고 금나라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에 요나라의 잔존 세력들은 서쪽으로 도망가 서요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훗날 징기스칸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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