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 살아가면서 자주가게 되는 곳 중 한곳이 장례식장입니다. 그 곳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으로 인해 슬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라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 때문인지 그 곳엔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설교를 하더라도 반응이 빠릅니다. 마음 가까이 설교가 들려지는 모양입니다.

듣는 자가 아닌 말하는 자인 나 역시,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인도 할 때마다 매번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코끝에 달려있다는 매우 지극하고 당연한 사실이 그곳에서는 마음에 큰 울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들이마신 숨을 내 쉬지 못하면 죽음이요. 내쉰 숨을 다시 들이마시지 못하면 그것 역시 죽음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 울림은 이내 이런 기특한(?) 생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잘 한 일로 요란 떨지 말고, 또 잘못한 일 때문에 지나치 게 절망하지도 말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가는 마음을 붙잡아 놓고, 동시에 바닥 없는 것처럼 꺼져가는 마음을 세워 놓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서는 ‘지혜자의 마음이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늘 죽음을 기억하고 산다는 건 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 지혜로운 일이라는 얘깁니다. 유한한 인생을 더 보람되고 값 지게 사는 비결은 늘 마지막을 기억하는 마음입니다.

아들 녀석이 퍼즐을 사 왔습니다. 요즘 퍼즐은 제가 어린 시절 맞추던 것처럼 100개 혹은 200개 조각이 아닙니다. 최소한 500개 또는 1000개 조각입니다. 저녁 먹고 두 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그걸 완성하였습니다.

전부 비슷비슷해서 참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전체 그림을 보지 않고서 그 조각만 붙들고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힘을 합쳐 마쳤습니다. 마지막 조각을 끼울 때 얼마나 뿌듯 하던지요. 퍼즐을 다 완성하고 난 후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완벽한 그림을 위해 모든 조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금은 붙들고 있는 이 인생의 일편(一片)이 왜 필요한지 알 수는 없지만, 또는 그 조각만 열심히 들여다보아 서는 도저히 어디에 어떻게 사용 되는 조각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조각 없으면 완벽한 그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젠가 마지막 조각을 맞추고 나의 인생이 완성될 때(아마 우리의 마지막 때이겠지요.) 그 때 우리는 지금 붙들고 있는, 내던지고 싶은 어려운 삶이라는 조각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날아가는 마음 붙들어 매고, 꺼져가는 마음 세워내는 장례식장은 어제나 오늘이나 참 좋은 선생님입니다.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3월입니다. 평안신문 독자들의 마음도 요즘 날씨처럼 따뜻한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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