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녹산의 난과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당나라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각 지역을 통치하던 절도사들이 각각 독립을 꾀하면서 당나라는 조종(弔鐘)을 울리게 되었다.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훗날 조정에 투항한 주전충은 황제의 실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 권력을 찬탈하였다. 결국 907년 당나라 황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양(梁)나라를 세워 당나라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주전충이 새로운 나라와 자신이 황제가 되었으나 지역의 많은 절도사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힘을 모아 양나라를 공격했다. 백성들은 또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남쪽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수차례에 걸친 남쪽으로의 이주는 훗날 중국의 객가(客家)라는 사람들의 군집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광동성과 복건성에 이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주전충이 비록 양나라를 세웠으나 그 또한 실정을 거듭하여 이존욱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존욱은 당나라 황실의 성씨와 같이 이씨였기 때문에 후당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자신의 금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약 70년 동안 5개의 왕조와 10개의 국가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송나라가 다시 통일할 때까지 ‘오대 십국’의 분열 시기라고 부른다. 이존욱이 금군에 의해 살해 당하고 이사원이 권력을 찬탈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이었으나 바로 양자인 이종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당나라 이후 중국은 권력을 뺏고 뺏기는 과정이 한동안 진행되었었고 심지어는 거란족의 요나라에 까지 원조를 요청함으로서 중원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렇게 중원의 북쪽에서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등의 5개의 왕조가 등장했고 대부분 10년도 채안되어 몰락을 거듭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오, 남당, 오월, 민, 북한, 전촉, 후촉, 형남, 초, 남한 등의 10개의 왕조가 명멸했다. 
 
북쪽의 거란족은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의 요청에 의해 중원에 진입을 했고 연운십육주를 할양받기로 하였다.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거란족들은 요나라를 건국하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중원에 대한 계속적인 지배에 대해 거란족 내부에서 그 필요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당분간은 한족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중원은 한족간의 분열과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부자간의 배신이나 자신의 심복들이 배신을 거듭하여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중앙 정부의 부재는 남쪽 지역에서도 곳곳에서 독립 국가들이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나라이다. 오나라는 양행밀이란 사람이 중국의 대운하가 지나가는 양주(揚州)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북쪽의 양나라에 대적할 만큼 실력을 키웠으나 이 또한 자신의 부하였던 서지고에 의해 찬탈당했다. 서지고는 성을 이씨로 하고 나라의 이름을 남당이라 하여 자신이 당나라의 후계자라고 칭했다. 
 
양주보다 더 남쪽인 절강성 지역에서는 소금 밀매상을 하던 전류라는 사람이 절강성 일대를 점령하면서 오월이라는 국가를 건국했다. 그는 북쪽의 왕조들과 교류하고 남쪽의 국가들과는 대립을 유지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당에 의해 멸망했다. 
 
그 남쪽에 있는 복건성 지역에서는 당시 절도사였던 왕심지가 민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내분이 일어나 이 또한 남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렇게 절강성 뿐만 아니라 복건성, 그리고 사천성과 호북성 등 각 지역들의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당나라 이후 벌어진 중국의 분열과 그때 등장했던 오대십국은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진 이후 중국이 어떤 길을 걷는가에 대해서 역사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후 중국의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에도 수십년간 군벌들이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이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