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현종이 양귀비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의 오빠였던 양국충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당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색을 가까이 했던 황제들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났는데 당 현종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젊을 때의 노력과 총명함은 여색에 흔들렸고 환관과 외척들의 발호로 관리는 부패했고 반면 농민은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때 장군이었던 안녹산과 그의 부하였던 사사명이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755년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사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이 일어나자 당 조정은 처음에는 이에 대해 믿지 못했고 금방 진압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현실화되자 방어전략을 준비하였다. 우선 안녹산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역에 방어선을 펼치기 시작했고 현종의 아들인 이완과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 장군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낙양에서 당나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한달만에 낙양성이 안녹산의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열세를 느낀 고선지와 다른 장군들이 동관이란 곳으로 철수를 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다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변령성이란 간신이 고선지를 모함하여 고의로 철수를 했으며 패배의 책임이 있다고 누명을 씌웠다. 당나라에서 활약을 했던 고선지는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무능한 황제와 조정은 반격의 기회를 잃게 되었고 다시금 이민족인 가서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지방 관료였던 안진경과 안고경이 자신의 지역에서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면서 반란군의 진격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당 조정은 또 이를 무시함으로서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제 안녹산과 그 일당들은 반란을 일으킨 후 1년도 채 안되어 낙양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연(燕)이라고 하였고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겉으로는 장안을 지키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이미 사천 지역으로 도망갈 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의 일족들과 환관, 양국충, 양귀비를 데리고 장안을 떠나 사천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이 피난 길에서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이 모든 것이 양씨 일가의 부패로 생긴것이라고 폭동을 일으켜 양국충을 살해하였고, 양귀비도 자살하게 되었다. 이후 현종은 간신히 성도에 피신해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장안을 점령한 안녹산은 자신의 권력을 장남이 아닌 차남에게 물려주려고 하다 큰 아들에게 피살당하면서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당나라 각지를 다스리던 절도사들이 점차 세력을 키워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민족이었던 위구르족에게 도움을 청해 원군을 받음으로서 8년만에 진압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국토는 피폐해졌고 백성들은 고통받았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했던 당나라는 인구가 3600만 명이나 줄어들었고 진압을 도왔던 위구르족은 장안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면서 장안은 황폐해졌고 당나라는 더 이상 명맥을 이어가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 당나라는 소금의 전매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메우고 있었는데 그 가격을 폭등시키자 반드시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이에 소금 밀매업자였던 왕선지와 황소가 농민을 선동하여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세력은 날로 커져 60만 명에 이르렀고 장안을 점령하였다. 또 다른 황제였던 희종도 현종과 같이 성도로 피난길에 올랐다. 
 
황소의 난은 안녹산의 난보다 기간이 더 길어 875년에서 884년까지 거의 10년의 기간동안 전국을 유린했다. 이 황소의 난은 주전충이란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그는 이후 황제에게 양위를 받아 후량이란 나라를 세우면서 당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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