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 보면 다양한 미녀들의 얘기가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 미녀들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나라 시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는데 한명은 바로 측천무후이고 또 한명은 중국 4대 미인의 한사람인 양귀비이다. 

 
대부분의 미녀가 황제를 미혹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황제를 폐위하고 여자가 황제가 된 경우는 중국의 수백명의 황제 중에서 측천무후가 유일한 사례로 들 수 있다. 또한 아버지의 후궁이 아들의 후궁이 되었고 다시 황후가 되었으며, 이후 황제가 되었으니 마치 막장 드라마의 한편과 같은 일이 당나라 시기에 벌어졌다. 
 
그 주인공인 측천무후(624 – 705)는 원래의 성은 무(武)씨였고 이름은 조(照)라 하여 무조였다.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던 황제인 당태종은 자신의 황후가 사망하자 당시 14살의 어린 무조가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궁에 입궁시켜 재인(才人)으로 궁중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리고 미색을 지녔던 무조는 태종의 총애를 받았고 태종에게 간하여 아홉째 아들인 이치(훗날 고종)에게 세습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태종이 죽기 이전부터 무조를 연모하였고 무조도 비록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아들인 고종에게 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풍습으로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은 모두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무조도 감업사라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있었다. 고종은 감업사에 있던 무조를 몰래 가서 만나는 등의 행각을 저지르고 있었다. 유목민 계통의 전통에서는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나라 역시 유목민 계통의 왕조였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 중국의 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 역사학자들 중 일부가 이를 정당화 하는 것에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당시 고종을 둘러싸고 황후 왕씨와 소숙비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 무조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여 고종과 함께 있도록 하였다. 무조는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황후와 소숙비를 폐하고 이들의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여버렸다. 
 
그녀의 잔인한 행위는 점차 도를 더해갔다. 당시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하고 그 일가를 모수 몰살시켰다. 동시에 당시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폐위시키고 자신이 낳은 아들 이홍을 태자에 봉했다. 그는 원래의 황태자 이충도 대역죄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대신들과 함께 처형해버렸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이홍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독살을 해버렸고 자신이 낳은 둘째 아들인 이현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자 폐위 시키고 유배 보냈다가 결국에는 죽여버렸다.   
 
셋째 아들인 이현이 고종이 사망하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중종이었다. 무조는 중종이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자 황제에서 폐위시키고 막내 아들이었던 이단을 황제에 올려 그가 예종이 되었다.  
 
무조는 자신의 두 명의 아들을 죽였고, 나머지 두 아들은 황제에 올렸다가 폐위를 시켰으니 그녀의 권력에 대한 애착과 욕심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결국 690년에 당이라는 이름 대신 주(周)라고 국호를 고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무조가 측천무후가 되는 순간이었다. 
 
측천무후는 갖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정치는 잘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당시의 경제적 발전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훗날 측천무후는 자신의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자신은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비문에는 아무 글자도 기록하지 않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번성했다는 당나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발전되었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패륜과 피로 점철된 왕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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