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성했던 시기로 ‘대당성세(大唐聖世)’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당나라 시기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제적 도시였다. 

 
당나라 시기에 완성된 실크로드는 로마까지 그 길이 연결되었고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이 육로와 해상을 통해 전해졌고, 동시에 서양과 서역의 문물이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고 심지어 한반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당고조와 그의 아들 이세민, 즉 당태종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였고 만주지역과 한반도의 패자로 강성했던 고구려와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다시 부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고구려인들을 중국으로 끌고가 중국의 각지에 이주 시킴으로서 그 후환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의 수차례의 대규모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던 고구려는 내분으로 멸망하고 나서 그 유민들은 몇 개의 부류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는 당나라에 끌려가 당나라에 편입되는 부류이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와 서역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고선지 장군을 들 수 있다.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가 실크로드에서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큰 공로를 세우게 된다. 또 한 부류는 신라쪽에 투항하여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신라공격을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 한 부류는 당나라와 신라에 투항하기 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던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서 당나라와 투쟁하면서 새로운 생활을 모색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원래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살았던 말갈족 등의 이민족들을 다시 지배하에 두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부흥을 견제하기 위해 이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통제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또 다른 이민족인 거란족이 성장하여 당나라를 압박함으로서 통제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의 유민들은 국가를 세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차례의 당나라군의 공격을 용감한 고구려의 후예들은 다 막아내고 드디어 고구려의 옛땅에 나라를 수립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30년만에 대조영이 다시 고구려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처음에는 국가의 이름을 진국이라고 하였으나 후에 다시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발해의 건국은 당나라와 한반도 사이에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였다. 한반도의 남쪽에는 신라가 그리고 그 이북과 만주지역은 발해가 통치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패배의 기억으로 발해에 대해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대조영의 아들이었던 무왕은 당나라를 직접 공격하였고, 그 공격의 범위는 지금의 산동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로서 발해는 고구려 시기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발해는 남쪽으로는 대동강 이북지역에서 북쪽으로는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여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힘으로 발해를 억누르지 못했던 당나라는 발해와 화친을 요구했고 발해의 문왕(대조영의 손자)은 이를 수락하여 다시 당나라와 교류를 시작했다. 발해는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와도 교류를 재개했고 중국의 서쪽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돌궐과도 교류를 함으로서 그 외교적 힘을 과시하였다. 또한 일본과도 교류를 하였으며 그 문서에는 문왕이 자신이 고구려의 왕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발해를 가리켜 해동성국이라고 하였으며, 발해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고 산동성에는 당나라와 무역을 하기 위한 발해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훗날 통일이 되면 우리의 역사인 발해에 대해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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