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후 막내 아들이었던 이치가 20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이치는 매우 소심하고 심약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이었고 훗날 당나라의 왕권을 찬탈한 무(巫)씨의 권고로 황위에 올랐다. 

 
당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처로 삼았으니 아버지의 뒤를 이은 패륜이라고 할 수 있다. 무능했던 고종은 무씨의 의견에 따라 태종의 부하들을 계속 옆에 두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당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에 있어서 패권적이고 강압적인 확장정책을 계속하였다. 
 
이 당시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기로 서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았고,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에서 신라가 배신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당태종이 고구려에 패해 도주한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33개의 성을 빼앗고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러한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고종도 초기에는 고구려에 이길 자신이 없어 주저하고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때 신라를 공격하여 당시 신라가 당나라와 무역과 조공을 하던 한강 유역의 당항성도 함락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사로 잡혀 있던 백제의 의자왕은 국방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국방이 소홀해진 것을 알아차린 당고종은 드디어 당나라 군을 파견하여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당 연합군 20만 명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의자왕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의자왕은 초기에 충신의 말을 듣지 않아 전략적 기회를 상실하고 3만명의 병력을 잃고 나머지 만명중 계백에게 5천의 군사를 주고 막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20만의 대군을 5천명의 병력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계백은 결사항전을 불사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660년 7월에 항복하였고 백제의 많은 귀족과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 수가 13만명에 달한다고 기록되고 있다. 
 
당나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전해에 고구려의 발목을 잡기 위해 국경지역이었던 요하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의 남쪽이 취약하다고 생각되자 백제가 멸망한 다음해인 661년 정월에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때 백제 부흥군의 공격으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미루게 되었다. 
 
다시 8월에 전국 각지에서 모은 대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인원은 약 4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당시 고구려의 보장왕이 있던 평양성이었다. 당시 당나라군의 대장군이었던 소정방은 자신의 부하였던 설인귀에게 부여성과 신성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우회하여
평양성을 바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함락에 실패하였고 고구려 군대에게 보급로가 끊겨 몰살 당하기 직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구원부대에 의해 간신히 군량미를 얻어 퇴각하였다. 
 
평양성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 함락 시키지 못했고 심지어는 연개소문에 의해 당나라 군대 4만명이 몰살당했다. 결국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모두 실패하고 다시는 고구려를 넘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665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자식들간의 내분이 생겼고 666년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를 기회로 당고종은 50만명의 대군을 일으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의 동생은 20개의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버리자 신라는 김유신에게 20만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북쪽에서는 소정방의 대군이 물밀 듯 쳐들어 왔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함으로서 고구려는 건국 705년만에 멸망하였다. 중국이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고구려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사라졌으며, 우리의 영토는 이렇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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