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의 문제는 ‘개황의 치’라고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아들 양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광은 황제에 오른 후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검소하고 백성들을 우선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태를 보였다. 

 
수문제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운하가 필요함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러나 수양제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동시에 북경과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를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완성하였다. 백성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황제에 대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편 수나라는 중국의 남북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였고 주위의 국가들에게 복속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고구려는 수나라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나라와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구려(기원전 37년에서 668년)는 처음에는 고구려라고 부르다가 장수왕 시기에는 고려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가 있어 계속 고구려라고 호칭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주몽을 중심으로 하는 설과 동명성왕을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학설이 존재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한나라와 부여, 그리고 여러 부족국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생존과 발전을 거듭했다. 
 
고구려의 발전에 위협을 느낀 부여가 공격을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는 부여의 왕을 죽이고 부여를 정벌하였다. 이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한나라 4군과도 대립하였다. 고구려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여 만주, 한반도 북부, 러시아의 연해주와 몽골 동부까지 영토로 삼았으며 약 700년간이나 존재하였다. 특히 요동 일대에는 원래 공손씨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구려가 점령하였고, 위나라의 공격도 막아냈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에도 끊임없이 중국을 정복하였고 특히 사마씨가 세운 진나라가 세력이 약해지자 낙랑을 함락시키고 대방군도 점령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당시 전연(前燕)을 공격하여 지금의 북경과 천진까지도 점령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절정기는 광개토대왕시기로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실시하였고 한반도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복속시키고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부여와 동예를 병합하여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제 막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단번에 이를 거절하였다. 오히려 고구려는 598년에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이에 수문제는 육군 30만명과 수군 10만명을 파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돌림병과 풍랑을 만나 실해하였다.   
 
수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612년에 1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지역과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수양제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우중문과 우문술을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총력전을 시도하였다.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패한척 하면서 수나라군을 영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전멸시켰다. 백만이 넘는 대군중 살아남아 도망간 자가 겨우 2,700명이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네 번에 걸친 전쟁에서 고구려가 모두 이겼으며, 수나라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수양제 자신도 근위군들에게 살해당했고 4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만에 수나라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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