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이후 중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도 그 끝을 보이고 다시 통합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부터 계산한다면 거의 사백년의 시간이 지나서다.   

 
남북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워진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통일 왕조이기도 하다. 남북조 시기에 북쪽의 대부분의 정권은 유목민족들에 의해 성립이 되었는데 그 중 수나라는 선비족이 세웠던 북주(北周)를 멸망시키고 성립되었다. 그 혈통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한족문화와 융합된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한족이다 혹은 선비족이다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의 두 번째 왕조가 순수한 한족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수의 문제는 선양, 즉 합법적 권력이양 형식을 띤 권력탈취를 통해 수나라를 개국하고 장안으로 수도를 정했다. 지금의 서안인 장안은 중국의 지도를 보면 서쪽에 치우쳐 있어 서쪽으로 진출하기에 편리한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수나라는 남쪽을 정벌하여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우선 북쪽의 만리장성을 축조하여 다른 유목부족들, 특히 돌궐족이 남하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수문제는 국내적으로는 우선 중앙체제를 3성6부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3성6부제는 상서성, 문하성, 내사성의 3성과 이부, 도지부, 예부, 병부, 도관부, 공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나라와 한국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이 체제가 유지되었다. 
 
지방 세력과 호족들을 제거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과거제도를 도입하였다. 과거제도는 지방의 향리들을 제외한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여 국가가 임명하는 제도로 만들어졌다. 이 과거제도는 수재, 신사, 명경과로 구분되어 실시되었고 당나라 이후 청나라까지 중국의 관료 등용제도로 정착되게 된다. 
 
또한 중앙과 지방에 대한 명확한 권력 구분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율령제도도 완성하였다. 특히 지방의 관리가 중앙정부가 어려워지면 그 틈을 이용해 독립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역사적 반복을 막기 위해 행정과 군사도 분리하였다. 
 
이렇게 수문제가 완성한 대부분의 제도는 훗날 당나라에서도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 정치개혁을 가리켜 ‘개황의 치’라고 불렀다. 수문제는 북쪽을 안정시킨 후 남쪽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남쪽의 한족 정권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양자강을 넘어야 했고 삼국시대의 적벽대전과 마찬가지로 북쪽의 수나라는 육군은 강했으나 수군(水軍)은 약했다. 
 
수나라는 산동성과 여러 지역에서 함선을 만들기 시작했고 함대를 완성하였다. 드디어 수문제는 차남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1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남쪽의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신하들의 건의와 상소를 무시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수나라에 포로로 잡혀 장안에 끌려와서 자신과 그 주위의 간신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로서 중국은 오랜 분열을 끝내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수문제는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특히 귀족들의 반발을 억제하고 농민들이 자작농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삼장제’와 ‘균전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중국의 인구를 빠르게 증가시켰다. 동시에 중국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을 시작하였다. 
 
대운하는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항주까지 이어지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교통과 조세운반의 대동맥이었다. 그러나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수문제는 대운하를 건설하는데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바로 이를 중지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 수양제는 백성들의 고통이나 국가 재정에 대한 고려없이 대운하를 강제로 완성하고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서 수나라는 581년에서 619년이라는 36년의 짧은 기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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