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자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 백성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시대별로 인물별로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가혹하리만큼 착취당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말엽 일곱명의 특이한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항상 죽림(竹林)에서 서로들 모였는데 후대에 이들을 가리켜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완적, 혜강, 산도, 향수, 유령, 완함, 왕융이란 사람들로 부패하고 속된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죽림에 모여 술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노장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얘기하고 노래하면서 세월을 보낸 인물들이다. 
 
죽림이란 말은 단순한 대나무 숲의 의미를 넘어서는 자연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이들은 당시의 부패에 대해 특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완적의 경우, 자신이 바둑을 두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히 바둑을 두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옆에 사람들이 완적을 미쳤다고 비난하였으나 못들은 척 끝까지 바둑을 두고 나서야 피를 토했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는데 예로서 조문객을 맞이하다가 부자와 관리들이 찾아오면 갑자기 완적이 눈을 뒤집어 흰눈동자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를 백안시(白眼視)라고 하는데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긴다는 말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 출처가 바로 완적의 모친상에서 유래되었다. 
 
현재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인물은 혜강이었다. 그는 위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의가 배신하고 권력을 찬탈한 것에 대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평소에 그의 성품은 얼굴에 희노애락을 표현하지 않았던 인물로 사람들은 혜강을 보고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우뚝 서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가 그를 불러 관직에 앉히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그 사상은 “명교를 초월하여 자연에 맡긴다(越名敎而任自然)”라는 것인데, 형식과 예를 강조하는 유교사상을 비판하고 자연적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이 겉으로는 예의와 고상함을 유지하는 척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음흉함과 탐욕, 악행들의 허위와 가식적이라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들 중 특이한 행위로 주목받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유령이었다. 유령은 어지럽고 탁한 세상에서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지식인이었다. 잠시 관직에 올랐으나 그의 성격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옷을 벗곤 했는데 누군가 그를 비난하면 천지가 옷이 집이 속옷이라고 하면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괴팍하면서 자연에 동화된 인물이었다.  
 
완함이란 인물은 음악에 능통했고 특히 중국의 악기인 비파를 잘 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완적의 조카로 권력을 멀리 하였으나 혜강이 살해당한 후 압박에 못이겨 관리가 되었으나 관직보다는 도교 연구를 깊게 하였고, 그의 노자와 장자에 관한 연구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죽림칠현의 등장은 조조의 위나라에서 사마씨의 진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난세의 시기였다. 이때 위정자들은 백성들의 고통은 쳐다보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반대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지식인들이 마치 스스로 사회와 격리시켜 자신들끼리 모여 무위자연에 기초하는 독특한 생활을 지냈다. 
 
죽림칠현은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힘없는 지식인들의 무기력한 저항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자신의 이상과의 괴리를 술과 음악으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을 잊으려고 자학적 노력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속세를 비난하여 속세를 떠나 초월하고자 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다시 이들은 속세로 끌려 들어오는 환원주의가 계속되고 있다. 죽림칠현이 지금도 얘기되는 이유는 우리가 세속적 권력과 부패에서 여전히 빠져나오고 있지 못해 이들의 저항정신을 다시 초치해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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