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는 간웅으로 악당의 수괴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경극 중에는 심지어 조조를 죽이는 장면이 있을 정도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한나라 황제의 성이 유(劉)씨였으므로 당연히 유비에게 더 인간적으로 끌렸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유비는 한나라의 왕실과 같은 혈연으로 취급하여 황실을 복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아쉬움이 담겨져 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황제가 되고 누가 권력을 잡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윤택하고 평화로운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천하가 난(亂)으로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시대의 영웅인지도 모른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에 비해 월등한 우월적 지위에 놓여있었다. 그는 천하의 통일이 가장 우선한다고 여겼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을 정리하여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협력으로 자신의 생전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이후 역사는 조조의 생각과 달리 여전히 분열의 시기를 겪게 된다. 
 
조조를 환관의 후손으로 비난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조조의 아버지가 환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조조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는 오히려 성곽을 지키는 벼슬을 하면서 법을 따르지 않는 환관의 친척에게 곤장을 때리는 등 명분과 법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 했다. 이후 황제에게 몇 번의 간언을 하였으나 오히려 미움을 사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독서와 사냥으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다시 불러냈다. 세상의 어지러움이 계속되자 고향의 젊은이들을 모았고 정부는 그에게 전군교위라는 직책을 주었다. 또한 동탁의 횡포에 그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였고 다시 도망나와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하였다. 당시 반연합군의 맹주는 원소였는데 초기에는 그와 연합하여 동탁을 공격하는 선봉에 나섰다. 그 과정에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병사로 만들었는데 이때 수십만의 세력을 거둘 수 있었다. 
 
조조는 당시 최고의 무장이던 여포군을 섬멸하고 여포를 죽여 그 기세를 높일 수 있었고 이제 남아있는 강적은 원소였다. 그 사이 헌제를 황제로 옹립하여 명분을 쌓았고 천하를 통일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조조는 원소를 평하기를 지략이 부족하고 담력이 약하며, 질투심이 많아 전쟁을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초기에는 군사가 수적으로 불리하였으나 원소의 군량미를 불태워 한번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천하를 다투는 가장 큰 전투인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숱한 전쟁가운데 조조는 적들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하였는데 훗날 이러한 행위가 조조에게 악명을 씌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조는 이제 거칠 것없이 스스로 승상이 되어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넣게 되었다.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양자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의 군대와 맞이했다. 삼국지의 또 다른 영웅인 제갈량과 주유를 만나 백만대군으로 밀어붙였으나 화공을 이용한 전술에 말려 결국 패배하고 수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조조는 수차례 천하통일을 꿈꾸었으나 이미 남방과 서쪽에서 실력을 공고히한 손권과 유비를 제거할 수 없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을 평상복으로 염하고 금, 옥 등 진기한 보물을 묻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그렇게 장사를 지냈다. 
 
조조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천하를 통일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맞는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뤄줄 인재라면 신분에 상관없이 중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인재를 잘 사용할 줄 알았고, 냉정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현대에서 조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는 이유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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